Let it be me.
보통 생각은 느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도착했다. 지각생. 밤늦게 도착한 우울한 손님. 생각은 그런 것이었다. 느낌보다 훨씬 귀찮고, 성가시고, 까다로웠다. 나는 자주, 생각을 밀어내고 던져버렸다. 실상 느낌의 지배를 받아온 것이다. 이따금 신중하게 생각하며 살기도 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들을 오직 순간적인 느낌으로 살았다.
삶은 오직 지금의 느낌으로써만 살 수 있다고, 지금의 느낌으로써 살아야 한다고 느꼈었다. 그 느낌조차 생각이 아닌 느낌이 운반하는 느낌이었다. 어쨌든 활력 있게 나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그리고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나에게는 느낌이 중요했다.
사실 꼭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생각을 하는 순간도 얼마든지 지금을 살아가는 것이었는데. 깊이 생각하는 순간이야말로 지금을 아름답게, 생생히 살아가는 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었는데. 멈추어서 깊이 생각을 하는 것도 지금을 살아가는 중요한 하나의 기술이었는데.
나는 이 문제를 제대로 느끼거나 진지하게 숙고할 수 없었다.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왜 그랬나. 한 가지 원인은 누구도 나에게 그러한 사실을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문제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 어떻게 그토록 아무도 없을 수가 있었단 말인가. 소털 같이 많은 날, 이토록 긴 인생 속에서, 아무도, 어떤 누구도, '느낌으로써 살지 말고 생각으로써 살아봐.’, ‘느낌을 모두 멈추고 깊이 생각해봐.’라고 언급 한번 하지 않을 수 있었단 말인가. 잘 생각해보면 기이하고 놀라운 사실이다.
또 다른 중요한 한 가지 원인은 쫓겼기 때문이다. 사냥꾼에 쫓기는 어린 사슴 같았다. 늘 무언가에 쫓기며 살아갔다. 이 원인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더 이상 탐구하지 않기로 한다. 사회나 학교, 가족, 역사와 이념, 국가가 모두 이 문제에 개입하고 있다. 나의 문제는 아니다. 난 이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적이 없다. 이 문제의 제 일 원인은 내가 아니다. 문제 역사나 문제 관계, 문제 종교는 있어도 문제 사람은 없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한편 느낌만으로써도 살 수 있었던 것은, 삶의 조건이 그렇게 받쳐주었기 때문이었다. 안온한 환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별한 혜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순간적으로 느낌이 지시하는 대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었다는 것, 그래도 되었다는 것은 실패해도 괜찮았다는 의미가 된다. 그만큼 나의 출발선은 어쩌면 따듯하고 안전한 둥지 같은 곳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과 물질, 모든 면에서 안전했다.
느낌의 가득 참은 어떤 매력이 되기도 한다. 느낌으로 가득 찬 사람은 독특하고 자유롭고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그러나 어느 시점 이후, 더 이상 느낌만으로 살 수 없는 순간이 온다. 오히려 나의 훌륭했던 느낌들은 이제 혐오스럽고 부끄러운 것이 되어버린다. 꼭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느낌도 여전히 좋은 것이었겠지만, 균형이 깨어져 버린 것이다. 느낌에 치우친 삶. 생각이 부재된 삶.
부재와 결핍은 덮을 순 있지만 숨길 순 없다. 결핍은 반드시 어떤 필연적인 문제를 야기시킨다. 영양이 부족하면 머릿결이 안 좋아지듯 생각이 부족한 삶은 부스러기가 떨어지고, 어떤 결핍의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삶의 골격이 비어버리고, 그 형태가 일그러지고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영혼의 골다공증이나 백내장 증상을 보인다. 반짝이는 빛이 없는 눈빛이 된다. 탁하고 답답한 눈빛이 된다. 천장을 받혀야 하는 중요한 자리에 기둥이 없다. 건물의 골조가 녹슨다. 행동해버리면 아주 쉬운 것이 되어 버릴 삶의 형식들과 성취가 버거워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직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에 해당한다. 그와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문제가 있다. 존재의 문제다. 생각의 부재는 삶뿐 아니라 존재 자체에 공허한 슬픔과 상처를 남긴다. 생각은 느낌과는 달라서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 그리고 영원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생각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존재 자체를 떠받히는 것이다. 따라서 생각의 결핍은 삶의 현상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반드시 어떤 인격적인 특성으로 나타난다. 현상과는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하고 본질적인 차원의 문제는 언제나 존재, 그러니까 인격의 문제다.
불안이라고 표현해 본다. 이 단어만으로 충분히 표현되지 않겠지만, 불안은 생각이 부재된 삶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는 단적인 징후다. 생각의 영양이 부족할 때는 어떤 식으로든, 불안의 형태로 드러날 것이다. 여기서 ‘생각’, ‘생각을 한다는 것’이란 모호한 표현에 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그것을 구체화한 동의어 몇 개를 더 만들어 본다. 생각의 가장 큰 동의어 두 가지는 사랑과 영혼이다: (그밖에 쉼, 자유, 안식, 언어: 즉 어떤 생각과 짝을 이루는 언어를 가지는 일, 피, 기도, 노래, 숨 등이 생각의 동의어가 될 수 있다.)
사랑과 영혼. 영화 제목 같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들을, 또 마땅히 믿어야 하는, 마땅히 믿을 법한 신을 온 힘 다해 사랑하고 있다면 그는 가장 깊숙한 차원의 생각에 대해 게으르지 않고, 사랑함으로써 치밀하게, 온전히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생각한다는 것은 영혼을 찾는 것이다. 영혼을 찾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가만히 있을 수도 있다. 오래 달리기를 하거나 산책을 하거나 대화, 또는 독서를 할 수도 있다. 살아가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영혼을 찾는다는, 이 추상적인 문제의 해답을 얻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성서의 시편에서 도움을 얻곤 한다. 십 년 전쯤엔 아브라함 요슈아 헤셸의 안식도 도움이 되었고, 근래에는 올가 토카르추크의 잃어버린 영혼이란 책이 매력적이었다.
어쨌든 생각의 부재와 결핍에서 오는 인격적 특성을 불안이라고 표현할 때, 한 인간이 불안에 떨고 있다는 것은 토카르추크가 이야기한 것처럼 영혼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너무나 불안해 보이고, 영혼이 없어 보이고, 겉 욕망을 쫓아가며 낯부끄러운 말과 행동을 하며 살아가는데, 이것은 불안한 현실의 문제도 있겠지만, 영혼을 무시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느끼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느낌을 쫓아 맹렬히 달려가는 동안 생각에는 게을렀다. 행복이나 쾌락은 좇았지만 안식은 잃어버렸다. 음식과 물질은 챙겼는데 영혼은 챙기지 않았다. 어린아이 시절 충만했던 영혼이 모두 녹아 없어졌다.
카르페디엠을 나는 지금을 ‘느껴라’라고 느꼈다. 느낌에 집중하는 것은 지금을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살아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느꼈다. 생각은 나를 과거나 미래에 데려다 주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것에는 방해가 된다고 느꼈다. 삶은 나의 생각을 한가로이 기다려 준다고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느끼고 느끼고 또 느꼈다. 나는 느낌의 지배를 받아왔다.
따라서 늘 현재를 사는 데 있어 무언가 중대한 결함과 결핍을 느꼈다. 늘 잔잔하게 불안했다. 온종일 평안이 없는 삶이었다. 생생히 살아있으려 할수록, 느낌에 집착할수록 평안이 없었다. 그래서 이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멈춰 서서 생각하고는 했다. 그러나 아직 한참 부족한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이 미미한 작업을 하는 내가 유별나 보였나 보다. 몇 달간 머물렀던 외국에서 함께 지내던 사람들은 농담 삼아 나를 씽킹 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직도 나는 씽킹 맨이다. 해브 쏘우트가 아닌 씽킹. 완료가 아닌 진행. 씽킹을 하고 있다. 영혼을 찾고 있다. 그러니까, 렛 잇 비 미. 나는 생각 중이니 그대는 나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느껴라. 평가도 판단도 섣부르고, 응원도 위로도 섣부르다. 그냥 느끼고, 가능하다면 관상용 열대어처럼 가만히 쳐다보고, 가만히 좋아하고, 사랑하면 충분하다. 그러면 내가 어항 벽을 향해 입을 뻐끔거릴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그렇게만 키스할 수 있을 것이다. 렛 잇 비. 렛 미 리브, 애즈 아이 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