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역적인 방식의 설교는 종교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종교는 예상 가능한 하나의 어떤 이야기와 형식의 덩어리지만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예측 불가능한 모험이고 뜨거움이고 용기이고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희망이고 아름다움이다.
사람들은 보통 기독교는 몰라도 본능적이고 영적인 감각으로 그러한 하나님을 알아서인지, 그러한 하나님을 목말라해서인지 이야기의 전형성을 싫어한다. 예상되는 결론이나 그것을 항해 가는 과정이나, 그 모든 것의 반복을 좋아하지 않는다. 결론을 정하고 틀을 끼워 맞춰 들려주는 이야기의 형식을 듣기 싫어한다. 더 근원적으로는 가르치려고 드는 느낌 자체를 근원적으로 견디기 힘들어한다. 다수의 크리스천은 확실히 그러한 느낌에 대한 피로감이 있다.물론 넌크리스천이 그것보다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회중이든, 현실이 그러하리라는 것이다.
윤리 도덕과 종교의 공통점은 지루하다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도 지루해서는 들리지 않는다. 도달이 되지 않는 자신만의 뜨거움이 무슨 소용인가. 진리를 다루는 사람이 광고회사 회사원보다 메시지의 전달 방법을 덜 고민해되 괜찮을까. 무슨 말씀을 하실지 뻔히 아는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즐겨 듣는 학생, 과연 누구인가. 결론이 무엇인지 알고 보는 영화 감상의 과정이 즐거울 턱이 있겠는가 말이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내러티브의 기본이다. 그것을 위해 골몰해야 한다.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설교자의 열정이 펼쳐지는 내래이팅의 과정이 도덕적이고 지루하거나, 너무 엉성하게 느껴지면 그가 골몰한 하나님의 정념이 진정한 것이었는지까지 의심하도록 만든다. 전형성으로 가득한 따분한 이야기를 참고 앉아서 듣는 것이 신실함의 조건은 아니다. ‘신실한 회중은 설교자가 어떤 선포를 해도 아멘을 외치며 받아 먹어야 한다.’ 그렇게 오해되는 일이 반복된 탓에서 크리스천 우민화 현상의 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설교자들은 마름모꼴 형식으로 설교를 하는 것 같다. 어떤 화두를 던질 때 이미 결론이 어렴풋이 보이면서 시작해서, 마름모의 가운데 모양이 팽창되어가는 동안 약간의 긴장과 집중력을 환기시키는 요소가 있다가 역시 예상했던 결론으로 맺는 것이다. 그럴 때 정성 들여 준비한 몸통이 되는 부분의 긴장이나 참신함은 사실상 크게 쓸모가 없다. 결국 결론이 어떠할 것인지 예상이 가능하기 때문에, 직선적인 형식을 갖는 다른 설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지루함의 덩어리로 기억된다.
설교가 재밌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설교자가 은혜가 아니라 재미에 신경 쓰는 일이 태만한 태도다. 그러나 지루함이 기독교를 종교로 느껴지도록 만드는 데 중요한 원인이 되는 현실이라면, 사역자가 지루함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것은 태만함이라고 받아들여질 만하다.
마름모꼴 (긴 다이아몬드 모양을 눕힌 모양)의 설교가 하나님을 향해 마음과 지성이 열려있는 신앙인의 마음을 닫게 만들곤 하는 것 같다. 청중이 정성껏 준비한 설교에 은혜를 못 받았다는 사실로 그들의 신실함을 폄훼하고는 하는데, 몸을 움직여 교회에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자 모인 준비된 청중이다. 그 자리에 앉아 있다면 누구든지 그렇다. 그들은 불신앙인이 아니다. 오히려 믿고 싶어서 안달이 난 열정적인 구도자다.
당연성과 전형성. 종교에 젖어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상 가능한 어떤 플로우. 우리의 교회 현실에서 그것은 가벼운 주제가 아니다. 그런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설교자의 연자 맷돌(성령을 거스르는 죄인이 받는 형벌의 수단을 가르치는 표현)의 조건이 될지 모르겠다. 그런 문제로 수많은 크리스천이 주일에도 교회에 가기 싫어한다면 말이다. 방황하는 것은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나 경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진지한 숙고가 없는 교회의 리더들이다. 전자는 움직이는 방식으로 목말라하지만, 후자는 안주하는 방식으로 방황한다.
그러니까 설교의 running form은 옆으로 누인 이등변 삼각형 모양처럼 열린 방식이 좋겠다. 회중을 계도하려는 강박을 버리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역사와, 지금도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시고 앞으로도 역사하실 청중을 신뢰하면 어떨까.
그렇다면 과정이 마음껏 넓어져도 좋을 것이다. 그런 믿음으로 결론은 열린 결론으로, 질문으로, 각자의 개성의 특질에 따른 은혜로 남겨도 좋겠다. 귀납적으로 시작해서 귀납적 결론으로 맺는 것이다. 열어놓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열려 있으신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