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y own original authentic words
이따금 사람들이 왜 사람을 안 만나는지 결혼 생각은 있는지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묻곤 하는데 사실 아무 이유가 없다. 내가 고유한 누군가를 보고 고유한 누군가가 고유한 나를 보면 고유한 만남과 고유한 삶으로, 고유한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어렸을 적에 이미연을 좋아했다. 집안 어른들의 총애를 받던, 잘 생기고 공부도 잘하고 듬직했던 친척 형 방에 무심코 들어갔다가, 형 책상 위에서 영롱하게 반짝이던 이미연 책받침을 본 날부터였다. 나는 그날, 널찍하고 고요한 형 방, 큰 책상 앞에 서서 책받침 코팅 속에서 우아하고 상큼하게 활짝 웃고 있는 이미연을 한동안 진지하게 응시했고, 그 즉시 사랑에 빠졌다.
내가 유년시절에 한동안 이미연을 좋아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청소년기가 되고 청년기가 되면서 이미연은 자연스럽게 나의 마음에서 멀어졌다. 그렇게 희미해지다가 심지어 언젠가부터는 종종 헷갈리기까지 했다. 그때 내가 좋아한 것은 정말 누구일까. 이미연일까, 친척 형일까, 나일까. 아니면 친척 형이 좋아한 이미연, 그러니까 내가 좋아한 친척 형이 좋아한 이미연일까, 아니면 내가 좋아한 친척 형이 좋아한 이미연을 좋아한 나일까.
이제 나도 이성적 비판 능력이 생기고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나 여유가 생기면서 조금씩이라도,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들에 관해서 숙고를 해보게 된다. 그러면서, 조금 슬프고 가혹한 일이지만, 정말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이제 이미연도, 그토록 꿈꾸고 사랑하고 아끼던 이미연도, 진위성의 심판대에 올라야 하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축소되기에 이르게 되었다. 거의 교황을 뽑는 시간만큼 길고, 숨 막히게 느껴지는 신중한 숙고의 결과,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좋아한 것은 이미연 자체도, 친척 형 자체도, 나 자신도 아니었을 것이란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멋있는 친척 형이 좋아했던 이미연을 좋아할 줄 아는 나 자신의 모습을 앙모한 것일지도, 친척 형처럼 성숙하고 낭만적이고 멋있는, 어린 내가 되고 싶었던 나의 미래의 이미지를 목말라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따금 소중한 진리가 안일하게 관성적으로 선포되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종종 모방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가령 옛날에 다니던 교회에서는 중년의 부목사님들이 담임 목사님의 말투나 발음까지 따라 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봤다. 복음은 구전으로도 전해지지만, 인격적인 영향으로도 주고받는 것이어서 자기도 모르게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사람을 닮아가는 인간의 본성상 그럴 수도 있을 것이리라. 나는 인생의 중요 테마인 여자마저 친척 형을 따라서 막연히 무턱대고 좋아했는데. 목사님들은 담임 목사님을 얼마나 존경하면 그럴까. 그럴 수 있으리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처럼 관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함에도 강연자에게서 누군가의 흉내와 아류가 느껴질 때는 방어기제처럼 어떤 본능적인 거부감이 생기는 것 또한 사실이다. 특히 강퍅하고, 예민하고, 언제나 새로움에 목마름이 있는 나와 같은 청중은 모든 종류의 컨트롤 브이가 그냥 싫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말이지, 더욱이 거룩한 책의 성언을 전하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유명한 다른 설교자가 연상되는 것은 정말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다.
윗세대의 유명 설교자 모방 현상은 광범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건 그 세대에게는 유행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 하나의 문화적 코드였다. 그러나 x세대, 아니 mz세대의 새롭고 젊은 사역자가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은 무척 아쉽고 허탈한 일이다. 젊은 사역자는 어떤 것에도 탁월하지 않아도 좋으니 한 가지만은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 참신함. 젊은 사역자는 다 됐고, 다 닥치고, 그냥 한 번만 좀 참신했으면 좋겠다.
사역자가 누군가의 인격적 개성을 모방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진리의 진정성이나, 복음에 관련한 그의 경험의 고유성에 대한 신뢰감을 떨어트리는 일이 될 수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음에도 그렇게 오인되기 쉽다. 젊은 사역자에게는 기존 사역자들의 상투적인 신앙 언어에 영향을 덜 받은 개성과 새로운 아름다움의 가능성이 있다. 그에게서는 그 자신이 홀로 이해하고 믿는 진리에 대한 독특한 이해와 고민의 흔적이 느껴져야 한다. 누구도 따라가지 않는 것은 반드시 따라가야만 하는 누구를 따라가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사명이다. 어쩌면 그것은 사역자의 윤리적 책임이다.
기성세대가 가르쳐준 격식 있는 언어나 어투가 아니어도 좋다. 정통의 신학적 문법에 기반한 단단한 언어가 아니어도 좋다. 심지어는 본문의 말씀이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어도 괜찮다. 그 자신도 자신이 전하는 말씀에 믿음이 없어서 벌벌 떨려도, 떨리는 그 음성으로 불완전한 믿음의 언어를 있는 그대로 전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는 아직 불안에 빠질 권리가 있으며, 새로운 언어를 향해서라면 얼마든지 미숙해도 좋은 자유가 있다.
성서의 말씀은 살아있는 것이어서, 그것이 전해지는 자리마다 응당 살아있는 뜨거움이 느껴져야 한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인격적 빛을 품고 있는데, 말씀을 전할 때만 예외적으로 그의 고유한 빛이 가려진다면 진리는 그의 아름다움에 무슨 짓을 가한 것인가. 기독교의 진리가 정말 생명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개인의 고유한 개성과 빛깔로 외쳐져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매개도 없이 단독자로서 절망하고 희망하는 동안 그의 안에서는 진주와 같은 새로운 언어와 인격이 잉태될 수 있을 것이다. 복음은 구름과 별처럼 우리 모두가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에 관한 고백의 언어와 인격적인 향기는 어느 정도는 개인적이고 은밀한 것일 수밖에, 따라서 늘 새롭고 낯선 것일 수밖에 없다. 복음의 언어는 아홉 살 어린이가 포클레인을 생각하며 지은 기발한 동시나, 동네에 너무 착해서 미쳤다는 한 여자가 어느 날 내 두 뺨을 붙들고 읊조리는 괴상한 이야기처럼, 아주 특별하고 고유한 것일 수밖에 없다. 복음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그것을 진리로 믿어지도록 만드는 것은 그것의 일반적 진리성뿐 아니라 고유성까지, 그 일체가 정직하고 아름답게 느껴질 때일 것이다.
“내가 글을 쓰는 언어는 프랑스어도 크레올어도 아니다. 내가 종종 얘기했듯이, 나의 언어, 나는 마리즈 콩데의 언어로 쓴다.” 마리즈 콩데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한국어도 아니고 미국인 아무개 선교사의 유창한 영어도 아니고 특정한 종교의 언어도 아니고, 오직 오롯한 나의 언어여야 한다. 그러니까 듣는 이가 답답해서 속이 터질 정도로 더디더라도, 혹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고백하더라도, 자신의 언어로 독특한 진술을 해나가는 것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헤매며 찾은 한 단어, 한 마디를 진주처럼 내뱉는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면 그것은, 매 주일마다 설교 시간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꿋꿋이 듬직하게 앉아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응원해 드려야 한다는 고매한 생각을 떨치지 못하는, 선한 의지와 거룩한 책임감을 가진 성도들을 향한 예의가 아니다.
* 배경 그림은 김영민 교수님 sns에서 가져옴.
J stoitz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