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12

by jungsin



순식간에 슈퍼 갑이 되었다. 나는 ‘목사님’이 되었다. 집에서 갖고 있던 조막만 한 가게에서 편집샵을 하시는 분께 예전에 어머니께서 나의 신학 공부 히스토리를 말씀하셨었는지, 어느새 나는 그분께 가서, 목사님이 되었다. 그냥 목사님도 아닌 잘-부탁드려요-목사님이 되었다. 잘 부탁드려요 목사님이 너무나 어색한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부탁과 목사님은 얼마나 안 어울리는 단어들인가. 아니, 어쩌면 우리 현실에서는 너무 잘 어울리는 문장 같기도 하고. 수화기 넘어 들려오는 오묘하고 미묘한 그 문장에 닿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주저하게 되었다.


잘 부탁드려요 목사님. 그럼, 이제 나는 무엇을 잘해 드려야 하는가. 항구적으로 재계약을 해 드려야 하는가. 세를 동결시켜야 하는가. 마음 편히 자립할 수 있는, 월세 걱정 없는 작은 카페 하나. 나도 그런 것 좀 갖고 싶다는 소박한 야심. 잘 부탁드려요 목사님 앞에서 버려야 하는가.


부끄럽게도 사실은 좀 그랬다. 엄마는 아침 일찍 회사에 가서 어느덧 노을이 지고 있는데, 아직 안 오시고. 엄마가 후불제로 돈을 주시기로 하신 골목 끝의 작은 슈퍼에 가서 우물쭈물하다가 집어온 불량식품도 이제 내 배에서 꺼져가고. 배고픔도 잊고 하루 종일 뛰놀다 해질 녘 집에 뛰어 들어가서 봉지를 뜯고 꺼내온 삼양라면 수프. 그걸 좀 핥아먹고 싶어서 이제 막 절취선을 따라 스프 한톨이라도 흘릴까봐 조심스럽게 열었는데, 옆 동네 형이 와서 갑자기 친한 척을 하면서 그걸 달라고 할 때의 기분 같은 것이 스쳐갔다. 슬프기도 했고, 자신에게 화도 났지만. 부끄럽게도, 좀 그렇기도 했다. 거절하기는 차마 어렵고, 거대한 두 욕망의 충돌이 두렵기도 한 느낌. 이런 감각들은, 하지만 그렇게 낯선 것이 아니다. 사실은 매일 나를 지배하는 주된 감각들이 그런 것들이다.


도대체 내 영혼은 어디서부터 갈 길을 잃은 걸까. 작고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박혀 피가 흐르는 무릎을 안고, 어디에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국에서 부동산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나는 또 그것에 어떤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인지. 참 이 울지도 웃지도 못할 상황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아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내 미래가 몹시 혼탁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사실 이 땅에서의 미래는 별로, 아니 하나도 바라거나 목말라하지 않지만. 아무튼 그것은 어쩌면 이미 혼탁해진 것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잡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버리지도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나는 정말 깊이 생각해야 하고, 또 단단한 마음과 눈빛을 가져야 할 것 같다. 그래야 단단하게 죽을 수 있을 테니까.





한편 전화를 하다가 목이 메어 말을 잇기 어려운 순간이 있었다. 어머니께서 어떤 식으로 마음이 약해지셨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뭉클하고 아려왔다. 합리성과 논리 운운하며 엄마를 다그쳤던 내 모습이 떠올랐고,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고, 한번 있어봐 말씀하셨던 엄마의 마음이나 표정이 모두 이해되어서 울고 싶었다.


제대로 말도 못 해 돌려 말해야 하는 이야기, 끝없는 밤처럼 어마어마하게 어두운 이야기를 전하며 서로 살기 위해 눈치 보고 고민하고, 어렵고 민망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현실. 나도 가난뱅이 떠돌이면서, 거룩한 생존일지도 모를 상대의 상황은 또 그와는 별도로 사려 깊게 들어야 하는 현실. 그리고 목사. 권사. 이런 것들에 관해 깊이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기대하거나 기다리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도 숨 막히고 숨차게 덮쳐오고 있는 나의 ‘미래’도, 나의 눈빛도, 나의 존재도 혼탁하고 초라한 것이 될 것이고. 나의 죽음도 그처럼 왜소한 것이 되고 말 것만 같았다. 생명이 죽는 것은 죽는 것이고. 어차피 죽을 것이라고 해서 당장 불 속에 뛰어 들어가 존재의 존엄성과 자유까지 다 불살라버리는 불나방의 모습으로 죽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문득문득 그런 생각은 드는데, 크리스천으로서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도 지킬 수도 없이 나를 빼곡히 채우는 미시적인 자본주의의 감각들. 치졸한 마음들이 부끄러워 죽겠다. 삶이 너무 얄궂다. 너무 무겁고 너무 가볍다. 너무 현실적이고 너무 몽환적이다. 기이하고 가난한 영혼이여. 사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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