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페너

by jungsin




없다. 아무것도. 아무도. 없다. 희망이라고 할 만한 것이. 이 깊음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무도 당연히 없을 수밖에. 차라리 아인슈페너를 마시는 게.


난 지금 엄마가 혜화동 병원에 있을 때 엄마 손톱을 깎아주며 나누던 대화를 듣고 있다. 이런 게 있었구나. 잠잠히 죽음 사이로 침식되어가는 느낌이다. 이미 온 몸이 눈물이 되어 버렸다. 너무나 깊어 두렵다.


한동안 가족들과 대화를 안 했다. 오늘 난 문을 발로 차며 소리를 질러 목이 쉬었다. 스타벅스 닉네임이 김전도사지만 기도를 해서 목이 쉰 것은 아니다. 대화. 지독한 오해. 옹색하고 미련한 생각들. 옳고 그름의 대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정의롭고 치밀한. 마음이 녹아내리는 몸무림들. 비난과 이상하고 추한 행동들과 추한 감정과 고성과 오해. 가면과 불필요한 언어들. 어리석고 미련한 연기들. 신비로운.


교회의 작은 방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가 무엇인가 많이 잘못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기도실에서 잠깐 기도를 하는 듯 하다,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무언가. 무언가 정말 아주 많이 잘못 되어 있어.


가까운 사람들의 대화란 것은 참 그렇다. 잘 통하다가도 표현 하나나 말 한 마디에서 오해는 시작된다. 이제 어떤 대화도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다. 대화는 말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인데 나는, 알고 보면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꾸 그 길을 잃어버린다.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민족들과 포옹하고 교제하고 웃음을 나누었던 나인데. 차가 지나가면 먼저 가라고 양보하고, 멈추어주면 손을 들어 고맙다고 표시하는 나인데. 모든 사람을 그렇게 이해하고 안아줄 수 있는 나인데. 가장 절실한 사랑과 이해를 필요로 하는 대상에게 난 도무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사랑과 정과 기억으로 뒤엉킨 관계에서의 대화는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원래? 문장, 단어, 눈빛, 손짓, 제스처들. 대화의 사소한 오해나 사소한 비난에서 시작해 서로의 답답함이나 울분이나 옳고 그름만 정신없이 이야기하는 대화. 그리고 나. 여기. 지구.


산다는 건 깊은 사랑의 숨을 쉬는 일. 그러나 내 호흡에는 산소 농도도 사랑도 다 타서 말라버린 것 같다. 난 이제 지쳤어. 더 이상은 메칸더 브이라도 할 수 없는 일일거야.


지하철역 떡볶이 집에 들렀다. 아주머니께서 작은 떡이 담긴 매콤달콤한 컵떡볶이를 담아 주시는데 뒤에 계신 사장님이 잠시만요 아주머니 하시며, 여기서 못 드시는 거 아시죠? 카드 아직 계산 안 했죠? 아줌마 이거 담아 주세요. 가만히 보니까 아주머니 행동 하나하나에 지시적이고 권위적이다. 왜 이렇게 억압적이야 저 사장님. 불쑥 젊은 남자 사장님께 타오르는 마그마. 저렇게 권위적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매우 위험해지는 것을 스스로 느낀다. 오늘처럼 불안정한 날, 건조하고 억압적인 상황을 만나면 마른 성냥에 불꽃이 닿는 것처럼, 언콘트롤러블해지는 사람인 것 같다. 난. 아까는 그렇게 찬양을 열심히 부르더니 참. 나는 이런 식으로 살아 있구나. 신앙과 마음의 세계는 그렇게 간단한 세계가 아니겠지. 항공기를 만드는 것보다 더 엄격하고 속임이 없는 세계일 수 있겠지.

아.. 네. 나가서 먹어야 되죠? 플라스틱 박스 위에 종이컵에 담긴 떡볶이와 오뎅국물을 나란히 올려놓고, 멍하니 먹고 마셨다. 아인슈페너가 마시고 싶어. 멀리 사가정역 이디야에 왔는데 문을 닫았다. 미식거리고 맵고 목마른 입. 그럼 이제 어디를 가야 하지. 커피, 정말 간절한데. 커피가 없는 집. 커피가 있는 집. 집, 집, 무슨 집. 쟁반같이 둥근 달. 집은 집인데 어떤 집. 삶이 언제부터 이렇게 모든 순간 절실한 선택을 해야 했지. 이게 맞는 코스인가.


엄마 목소리. 짝을 찾을 수 없는 감정이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감각들이다. 이렇게도 살아야 한다면 너무 잔인한 삶이다. 모두 나 자신 때문인가. 아직 기독교의 진리에 거듭나지 못한, 미성숙한 나의 인격 때문일까. 아무튼 하나님께 묻고 싶은 것이 정말 많고, 또 밉고 냉담한 마음도 문득문득 들기도 한다. 신자는 이렇게 냉담자가 될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도 문득. 가혹하고 가학적인 하나님이 가능하구나. 그런 생각도 1 티스푼. 하나님은 어떤 목적을 위해 그렇기도 한 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 그럼, 어떻게 의지하지. 어떻게 전하지. 누가 전할 때 난 그의 눈을 어떻게 바라보지.


아이팟 너머로 엄마가 시계가 안 보인다고 답답하다고 하신다. 나도 답답하다. 시계가 안 보여서.





작가의 이전글엄마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