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사랑과 분노는 정비례하는 것

by jungsin


슬픈 이야기가 들려왔다. 또 한 분의 소중한 성도의 가족이 잠깐 먼저 하나님의 나라로 가셨다는 비통한 소식이었다. 한 팀으로 중국 선교도 같이 가고 새벽 늦게까지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있는 한 자매의 가족 분에 관한 소식이었다.


밤늦게 병원을 찾았다. 아직 아무 생각도 없고 그저 먹먹한 가운데 첫날 잠시 찾아가 인사하고 가족분들을 뵈었다. 다음날인 주일에도 저녁예배가 끝나고 교회 청년들과 찾아갔었는데, 역시 먹고 웃고 떠들며 교제만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그 자매와는 별다른 말을 못 나누고 돌아왔다. 세 번째 날이 되어 마침 그 자매가 일행 쪽 자리에 가까이 왔을 때 무거운 마음으로 겨우 몇 마디를 나누었다. 그 자매가 얼마나 순수한지 나는 알고 있었다. 듣자 하니 슬픔뿐 아니라 두려움과 후회에 휩싸여 있는 듯했다. 그 자매가 슬픔을 둘러싼 사실이나 감정들을 이야기해 주는데도 자세한 상황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다. 다만 어쨌든, 무언가 자신의 잘못이 있는 것처럼 느끼면서 힘들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학 시절 동아리 간사님께 양육을 받으면서 입에 단 침이 고이도록 외우고 마음으로 되뇌었던 로마서 8장 1절 말씀(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도 떠올랐고, 구글 메모에 천 번도 더 썼을 ‘괜찮다(괜찮을 거예요)’는 말이 떠올랐다. 그러다, 바로 그런 것(자매가 후회하고 있는 기억)까지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말이 입에서 운이 떨어졌는데, 다행히 마침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물려서 묻혔다.


교회 개척 초기에는 단기선교를 갔을 때 한 팀이기도 했고, 예전에는 힘든 일이나, 웃긴 이야기나, 퍽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이였다. 그 시절 가까이서 함께 하던 시간들 동안 그 친구를 아끼는 마음이 있었지만 이후에는 내 삶의 정황에 꽁꽁 묶여 몇 년간 연락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기에 그 친구의 슬픔에 무슨 말을 더 보태기가 머쓱했다. 얼마나 관계적으로 잇대어 그의 삶에 내가 관여했는가 하는 지점에서 좀 민망한 측면이 있기도 했다. 그런 느낌들이 눅눅한 공기에 젖은 가을 낙엽처럼 땅바닥에 붙어 마음이 좀 무거웠다. 그러던 중 그 외에 몇 가지 말들이 더 떠오르려고 할 무렵,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말풍선들을 펑 터트려 버리고 잊어버리려 했다. 미미한 눈빛과 존재와 마음 외에 무엇이 위로가 자유가 될까 싶었다. 아니 어떤 말도 지금의 그에게는 전혀 위로나 희망이나 자유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친지나 공동체가 모여 함께 슬픔을 나누고 위로하는 일은 너무나 고마운 일이지만, 또 너무나 큰 위로가 되어 주기도 하지만, 어쩌면 대체로 그런 문화적인 미덕과 개인적인 마음들은 슬픔을 잠시 잊게 해 주고 지연시켜 주는 정도가 최선의 역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일들이 슬픔을 단 1 그램이라도 빼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 깊은 슬픔은, 철저히 혼자만의 것일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어항 속의 물고기가 어항 밖의 나를 나를 바라보면서, 입을 벙긋거리며 보글보글 기포를 만들지만, 그 물고기의 언어나 감정이 나의 가슴에 다가와 박힐 수는 없는 일만큼이나, 말을 통해 누군가에게 위로를 주는 일은 너무나 막막한 일이다.


공동체의 팀원으로서 해줄 수 있는, 문득문득 떠오르는 말들은 개인적인 관계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 있지 않을 때, 물 위로 떠올라 가벼이 흩어질 수 있는 물고기의 기포 같은 것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는 무력감 같은 것. 그 모든 일체가 슬프고 암담했다. 그렇게 곰곰이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그러다 개인적인 경험을 떠올리며 이럴 때 아주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산문이 아니라 시의 언어일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문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또다시 산문의 논리적인 말로 위로를 주려는 것보다 시나 노래, 찬송의 언어가 훨씬 더 와닿기도 하고, 어렴풋한 희망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은 나의 경험이기도 했다.


한 편으로 들었던 감정은 나도 잘 알 수 없는 감정이었는데, 화가 좀 났다. 하나님께. 품격이 있는 화라기보다는 거친 분노에 가까웠다. 화딱지나 승질이라는 표현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런 감정의 자리에 서서 생각해보면 산문의 언어를 사용하려면, 곱게 사용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거칠게 표현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격렬히 슬프고, 화가 나고, 따져 묻고 싶은, 혼란스러운 모든 감정을 차라리 슬퍼하는 사람 곁에서 함께 쏟아붓는 것이다. 운명의 주권자에게, 정말 성질을 부리면서 따지고 울분을 토하며 항변하는 것이다. 하나님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이게 뭡니까, 도대체. 당신의 나라는 왜 이렇게밖에 닿을 수가 없는 겁니까. 정말 비통하고 짜증이 나고 성질이 납니다 주님.


슬픔 속에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하나님을 등지지 않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의 편에 서느니 차라리 사람의 편에 서는 것이 적절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끼는 사람을 뒤춤에 숨기고, 사람의 편에 서서 하나님께 거칠게 따져 묻고 항변하는 것이 그 반대편의 태도보다 어쩌면 더 신학적이고, 진정한 사랑의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하나님도 당신의 편에 서기보다 아파하는 자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가슴에 팡팡 주먹질을 하며 울고불고 절규하는 사역자의 모습을 더 사랑하실지도 모르겠다. 그런 마음이 더 하나님을 아는 마음일지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미미한 깊이의 상상력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미약하게라도 정말 힘 있는 위로와 희망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신실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대변하는 사람보다, 그토록 진솔하게 고민하고 인간적으로 갈등하며 방황하는 사람에 가깝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학적으로 더 적확한 위로의 자리는 가장 인간적인, ‘사람’의 자리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본성이 완전한 타락하고 부패했다는 신학을 통째로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인간성은 곧 죄성이라는 단선적인 등호를 깊은 고민 없이 너무 가볍게 사용하거나 인간성과 신성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성속 이원론적 관점이 아무 비평의 지점도 없는 무흠한 신학일 것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다.


더 깊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신앙인은 더 깊이 그를 미워할 수도 있는 사람일 것이다. 더 유능한 신학적 변호자는, 하나님만 자폐적으로 사랑하기보다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일 것이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실 속에서 절망의 절규를 하며, 더 이상 도무지 하나님을 이해하지도 신뢰하기도 어려워하는 이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을 변호하고 그의 사랑을 설득하는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일 것이다.


슬퍼하는 자매가 속해 있는 교회의 목사인 친구와 마주 앉아 우거짓국에 밥을 푹푹 말아먹으며, 이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다. 자매가 슬픔에 빠져있는 것은 물론이고, 죄책감까지 느끼며 힘들어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때 너무나 맛있었던 국밥을 한 수저 입에 물고 오물오물거리다 말고, 나도 모르게 문득 이렇게 말했다. ‘약은 하나밖에 없는 거 같애. 사랑밖에 없는 것 같애. 내가 이 문제에 전문가잖아. 정말 고민 많이 했는데, 씨름하면서 느껴보니까 죄책감을 풀어주고 덮어줄 수 있는 건 사랑밖에 없는 것 같아.’ 친구가 눈을 깜빡이며 정확한 뜻을 물어왔다. ‘뭐라고? 사랑? 어떤 사랑?’ - ‘뭐, 아버님의 사랑이든, 하나님의 사랑이든. 사랑. 그 사랑이 느껴지면 괜찮아질 수가 있더라고.’ (깜빡깜빡..) ‘그래..?’ - ‘응. 하나님이 또는 아버님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질 수 있고 들려질 수 있다면 괜찮아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어디론가, 우리를 밀고 나가는 것은 결국 사랑의 힘인 것 같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어디로든. 어떤 경우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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