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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량의 순간

by jungsin



놀랍도록 그대로였다. 백화점 지하 식료품관에서 슬쩍 코끝을 찌르고 마는 모카번이나 삼호어묵 냄새 같은 것들, 백화점의 고급 공기 냄새. 7호선 지하 역사 공간의 생생한 활기나, 도시의 거리에만 흘러넘치는 생기. 좋아하던 독립서점 베이커리 카페의 설레는 공간감과 스타벅스에서 일본어 과외를 받는 여학생.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이면 수도 없이 마주쳐서 사물이나 풍경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짧은 머리의 성인나이트 웨이터 아저씨까지. 거의 완벽하게 그대로였다. 나의 사랑스러운 동네는. 나를 가장 사랑해 주었던 한 사람이 더 이상 이 동네를 품고 있지 않다는 것, 그 한 가지만 빼고는.




​어쩌면 이 순간을 만난 것은 운명이라고 느껴질 만큼, 이상한 기시감마저 들었다. 작년 장마철에 쓸었던 곰팡이도 다 닦아내지 않은 두 칸 방 자취집에서, 옆으로 누워 시름시름 앓고 울고 중얼거리고, 이따금 오열했던 날들. 그런 날들조차 꿈이 아니었을까 느껴질 정도로 나의 도시는 익숙하게 잘 알고 있는 생기를 품은 채, 뭉클하게 그대로였다.




​백화점 식료품관을 나와 건너편의 스타벅스로 가기 위해 지하철역을 지날 때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성취나 번성, 획득, 이익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고. 그것을 이제, 드디어 내가 이해한 것 같다고. 눈부시게 반짝이는 생의 보석은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는 순간들에, 그처럼 작고, 작고, 작은 순간들에 있는 것이라고. 슬픔과 회한, 그리고 심지어 희망까지 뒤섞인 감정이 차올라 아려왔다.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다는 느낌이었다. 그리움과, 그것과는 상관이 없기도 하고 있기도 한 부차적인 문제들(밀린 월세나 해결하지 못한 현실의 삶의 문제들)로 뒤척이며 좀비처럼 지내왔던 시간의 실뭉치에서 한 가닥 실올이 풀린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자신이 없었다. 무언가를 알게 된 것은, 어둠에서 풀려나게는 해주지만 빛처럼 곧장 삶을 밝혀주지는 않으니까. 사랑과 용서, 진리. 화해. 재회. 쉼과 안식. 그처럼 나에게 정말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는 일들에 나는 열정을 다 쏟아부으며, 온전히 집중할 수 있을 것인가. 여전히 자신 없었다.




그보다 훨씬 더 높은 확률로 나는 또 앓고 그리워하고 분노하고 용기를 잃고 무기력해질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숨을 잘 쉬지 못하겠다. 두려움과 절망이 거인처럼 느껴진다. 실은 이전처럼 희망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은 아예 없다. 대신 나를 지배하는 것은, 그냥, 이 터널 밖으로 나갈 수 있을 정도의 희망만이라도 주어져야 소명을 찾기를, 행복을 찾기를 포기하지는 않을 텐데. 딱 그만큼의 희미한 기대감이다.




그리고 이러할수록 글을 쓴다는 것은, 점점 더 큰 의미가 되어가고 있다. 글은 이 생의 복잡한 악기들이 내는 음들을 하나의 질서로 배열하고, 생동감 있는 리듬을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고, 절망과 허무에 빼앗겨버린 시간을 다시 *되찾아오는 지혜자의 목소리가 되기도 한다. **의미의 시간 한복판으로 들어가기만 한다 해도, 내 눈을 덮고 있는 하나의 백내장 막은 걷힐 수 있을 텐데.










* ‘엑사고라조ξαγοράζω 사오다, 속량하다, 구출하다’, 신약성서. 에베소서 5장 16절.

** 카이로스καιρό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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