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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gsin Jun 25. 2023

희망

우리의 희망찬 인생에 대해서


글쓴이의 말.


이 글은 어둡습니다. ​ 인간에 대한 비관이 배경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류의 글을 좋아하지 않으시면 읽기를 여기서 멈추셔도 됩니다.


다들 이렇게 살기 힘든 세상에서, 굳이 제가 어두운 글을 ​쓰는 이유는 우선 쓰는  자신이 어둠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저의  가지 믿음 때문입니다.


첫 번째 믿음은 내면의 감정적 성분들을 말로든 그림으로든 예술로든 운동으로든 다 풀어내는 일이,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는 일과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는 믿음입니다.


예술을 향해 개방되어 있는 영혼은 어둠을 꽁꽁 감춘 밀봉된 영혼보다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정신의 건강에 더 유리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오직 글쓰기만으로도 영혼이 구석구석 치유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숙고하게 될 만큼 저는 마음을 정리하고 싶을 때 쓰는 일에 의지하게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 때문에 나중에 비공개로 바꾸더라도 우선은 어둠과 습함을 일일이 언어로 써서 통풍이 잘되는 곳에 널어두고 햇볕을 쏘이게 하기를, 종종 즐겨하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서, 글로 자기의 이야기를 다 말할 용기가 있는 사람은 성장하고 치유될 수 있는 여지가 더 많다고는 믿습니다. 개방된 영혼에게는 틀림없이 희망도 개방되어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믿음 역시 첫 번째 믿음과 연관된 믿음인데, 글쓰기 자체의 힘에 대한 믿음입니다. 저는 쓰기의 힘을 어느 정도 의심 없이 신뢰하고 있습니다. 경험적으로 느낀 바, 글을 쓰는 일은 가장 정확하게, 또 가장 손쉽고(글쓰기가 쉽다는 의미가 아니라, 누구든지 무엇이라도 쓸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정직하게 자신을 위하는 일이 됩니다.


그러한 글쓰기 안에서 글쓰기 자체의 힘과 자신의 진실함을 믿고 굳세게 앞으로 나가며 써나가는 글은 힘이 있습니다. 아직 제가 거기까지 정진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제가 쓰는 이런 류의 글들은 죄다 그곳을 향하고 있습니다(제목처럼 검은 글쓰기란 그러한 지향 안에 있습니다.).


​이런 저의 세계관 안에서 제가 쓰는 어두운 글들을 이해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이렇게 거창하게 말한 것에 비해서 이 글이 그렇게 심하게 어두운 글은 아닐 거예요. 가령 의도적 비관을 통한 희망 찾기라고 이해해 주세요. 슬픔은 기쁨을, 분노는 자유를, 비관은 희망을 향한다고 믿습니다. 읽어주시고 공감을 표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모나코 근처의 절벽 위의 좁은 길, 클로드 모네 1884




쓰자. 읽고 싶은 글 없으면.




만사가 다 귀찮아졌다. 하고 싶은 것들이 수십 수백 가지였던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이 거의 다 사라져 버린 오늘, 화창한 2023년 유월의 주일 아침이다.


사연을 다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이제 정말 맥이 다 빠져버린 것 같다. 그렇게 좋아하던 음악을 듣는 것조차 피곤하게 느껴지니. 지금 이곳엔 소형 선풍기 소리만 나부낀다. 아마 나는 이제 삶의 어떤 끝에 와있는 것 같다. 나를 좋아해 주던 친구들도 다 귀찮고, 내가 좋아하던 친구들도, 가족도.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읽어 내려가다가 못 읽겠다고 미안하다고 혼잣말을 하고는, 덮어두었다. 조금이라도 가독성이 좋지 않게 느껴지는 문장의 나열들 목전에 막히자 힘이 빠지고 숨이 막혀 더 읽을 수가 없었다. 텍스트가 주는 쉼에 허기졌었는데, 나는 배고픔과 정확히 반비례하는 읽기의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포테이토칩밖에 집어먹을 수 없는 체력을 갖고 있는 내 앞에, 두 손으로 들고 뜯어먹어야 하는 통닭구이를 내미는 것 같았다.


너무 나르시시즘에 빠져버렸네, 쉴 수 없는 글을 쓰고 있네. 이렇게 덕지덕지 기운 누더기 같은 글을 쓸 거라면 프란츠 카프카의 말처럼 “내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처럼 지친 내가 맥없이 빨려 들어가도록 더 큰 장력으로 써주든지, 이전에 좋았던 글처럼 달콤하고 고요하게 쉴 수 있도록 좀 써주지. 작가가 미워지기까지 했다. 젠체하지 말고, 편하게, 읽기 좋게 좀 쓰지.


새벽 늦게 최악의 지친 마음으로 집에 들어와서 콜라와 햄버거를 먹다가 맥주로 전환해서 두어 캔을 마셨다. 연애 예능을 틀어 놓고 보았지만 이전처럼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보게 되지는 못했다. 금세 날은 환하게 밝아왔고, 그렇게 창밖에는 새들이 짹짹 지저귀는 희망찬 여름의 아침이 밝아왔다.


​​모든 것이 피곤했다. 상을 치우는 것도 힘겨웠는데, 겨우 치우고 마침내 누웠다. 그리고 좋아하던 작가의 글을 읽다가 몇 줄을 채 읽지 못하고 혼잣말. 쓰자. 읽고 싶은 글 없으면.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은데 글을 쓰자니 어떤 말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답답하기만 하다. 한 마디만 한다면, 이 세상에 한 만디만 남길 수 있다면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이 세상 후회 없이 살았노라고, 소풍 같았노라고, 천상병처럼 말하면 어떨까 떠올려 보지만, 아니. 그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낙천적인 시어로 소외의 시간들을 뒤덮어버리는 것은 진솔한 고백이 아니다. 어떻게 과연, 인생이 소풍 같은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조금도 그렇지 않지. 크리스마스 악몽 같다면 몰라도.






어거스틴이 맞았다.




아. ​정말 하고 싶은 한 가지 말은 떠올랐다. 나를 좀 내버려 둬 줘.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제발. 이해할 수 없으면, 사랑하지 않으면. 내 말은 들을 생각이 없으면서 두꺼비처럼 하고 싶은 말만 잔뜩 입안에 물고 있을 거라면, 그냥 날 좀 내버려 둬 줘. Let it be me.


그러면, 날 좀 내버려 두면, 나는 이제 하고 싶은 한 가지 일, 읽고 쓰는 일을 마음껏 하다가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좋아하면 자기 호기심만 채우고 착취하려 들고, 싫어하면 이용하려 든다. 벌레만도 못한 나를 어찌 용서하십니까. 어거스틴의 원죄론에 대해 의문과 지적 반발심이 있었는데,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고 했던 어거스틴의 생각에는 아무래도 큰 오류가 없는 것 같다. 인간은 악마에 가까운 죄성을 가지고 있다. 악마가 억울할 만큼 말이다.


그래서 정말 천상병처럼 소풍 같았다고 말하지는 않아도, 실컷 자다 간다고, 전쟁통 같은 세상에서 내 한 몸 누이고 쉴 수는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어리석은 인간들아 제발 요란 좀 떨지 말라고. 어차피 생은 너무나 짧다고. 그러니까 귀찮게 좀 그만하고, 연락도 좀 그만하고, 찾아오지도 말고, 날 그만 좀 내버려 두라고. 이런 말 정도는 꼭 한 번 남겨보고 싶다.


어차피 인간은 소통을 하는 일에는 불완전하고 부족하기만 하여 오해로 점철된 시간들을 소비할 뿐이니, 차라리 지혜자는 자기에게 집중할 것이다. 그렇잖아도 어차피 인생은 혼자다. 홀로 사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인생이란 하나의 연극이다. 문제는 우리의 연기란 것이 밑바닥에 가까워질수록 다 구역질 나는 연기들 뿐이란 것이다. 진실이라곤 찾을 수 없는 거짓 연기들. 진짜 자기를 찾기까지는 거짓뿐인 삼류 배우가 되어 살아간다. 인간은 누구나 그렇게 살아나가게 된다. 특별히 나빠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거의 다 역겨운 연기를 하며 살게 된다. 사람이란 그렇게 가난하고 가여운 존재다.


우리의 글도 대화도 만남도 허튼 말들도 다 연기다. 다 얕은수 들이다. 자기를 찾을 때까지는. 그러니 자기 자신으로서 살 수 없으면 일을 한답시고, 영향을 준답시고, 사랑을 한답시고, 섣불리 만나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그리거나 노래하거나 쓰지도 말아야 한다. 자기 자신으로서 말할 수 없으면 침묵해야 한다.


​소형 선풍기 소리가 듣기 좋다. 묘하게 치유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충전을 시키면 자기 에너지만큼 힘껏 돌고 정지하고 마는, 딱 자기 자신만큼만 울고 소진시키는 선풍기만큼도 인간은 진실하지 못하고 교만하고 탐욕스럽다. 어리석어 슬픈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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