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름다움.
엊그제부터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노란색 문학잡지를 머리맡에 두고 팔을 베고 엎드려 있다가, 그대로 스르르 잠깐 단잠을 잤다. 티브이에서는 물리학자가 계속해서 리처드 파인만에 대한 이야기나, 가상의 외계인과 인간의 시간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선잠을 자는 내내 물리학자의 이야기가 계속 머릿속을 울렸던 것 같다.
잠에서 깨자마자, 문득 아름다움에 대해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벌떡 일어났다. 티브이를 끄고, 태블릿의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컵에 얼음을 담고 새벽에 내려놨던 대형마트 하우스 블렌드 커피를 얼음 위로 부었다.
가능하면 긴장감을 갖고 쓰고 싶어서 등받이가 없는 그레이 색 벨벳 화장대 의자를 책상 앞에 옮겨놓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았다. 빌리 아일리쉬의 음악을 시작으로 플레이리스트를 튼다. 창 바깥에서는 부지런한 아침 새가 째악째악 운다.
투명한 컵의 손잡이를 집어들고 한 모금 커피를 마시자, 감칠맛과 약간의 산미, 달큼한 여운.
완벽하다. 낯선 외국, 아마 동남아시아 정도의 작은 에어비앤비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새소리를 들으며 글을 쓰고 있는 것만 같다. 글쓰기의 시작으로 이보다 완벽한 감각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0.1
바닥에 앉아 밥을 먹고 교양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모카커피색 극세사 러그를 쓰다듬는다.
쓰다듬다가 바닥에서 조금 큰 모래알 같은 것들이 만져지면 그것을 기어이 손가락으로 집어서 극세사 털 사이로 뽑아내 쟁반 위에 올려놓는다. 알갱이는 갈아진 커피 원두일 수도, 또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는데 나는 아무튼 그것들이 러그 털 사이에 껴 바닥에 그대로 있다는 느낌을 견디기 힘들어 그것을 집어내고 또 집어낸다. 그렇게 계속 내 주변이 완전히 부드러워질 때까지 또 쓰다듬고 쓰다듬는다. 극세사가 극세사다워질 때까지, 완전히 부드러워질 때까지.
내가 왜 이런 행동을 반복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머니도 그러셨고, 내 주변에서 열정을 가지고 삶을 아름답게 가꿔가길 원하는 사람들은 다, 무언가를 정돈하고, 치우고 청소하고 정리하며 살아간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카톡방을 나가고, 스승의 날 시의성에 맞춰 단카방에서 교수님께 인사를 드리고,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고, 카페를 간다. 커피의 맛에 집착하고, 어떤 맛이었는지 표현하길 원하고, 또 기어이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나는 글을 쓰면서도 키캡 사이에 낀 작은 먼지가 보기 싫어 사놓고 아직 떼지 않은 책 먼지떨이의 상품 라벨을 키캡 틈 사이에 끼워 먼지를 빼내고야 만다. 책 먼지떨이는 또 얼마나 비싼가. 타조 털인지, 어떤 동물의 털인지 모를 천연 털로 된 먼지떨이 하나에 수만 원을 호가하는데도, 손상을 최소화하며 책 위에 앉은 먼지를 털어낼 수만 있다면야, 기꺼이 값을 지불하고는, 난 또 집에 사들여 놓고야 만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닦고, 치우고 버리고, 깨끗이 하고 공간을 만들고 화분을 놓고 흐뭇하게 바라보는 것. 자꾸만 쓰다듬고 먼지를 털어내고, 맛있게 커피를 내려 마시고, 또 생각하고, 글을 쓰고, 힘을 써서 할 일을 하고, 귀찮음과 게으름과 맞서며 움직이는 것.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해서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쓰다듬는 것이다.
반짝반짝, 자꾸만 윤이 나도록 깨끗해지도록. 버리고, 털고, 쓰다듬고 어루만지는 것. 사랑해서다. 그리워해서다.
매 순간 죽고 싶고, 한없이 바닥을 뚫고 들어가 영원한 안식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나를 깨우는 것은 그 빛이다. 그리움의 빛이 운동 에너지를 만들고, 아직 나도 알지 못하는 어떤 방식으로 사랑하도록, 누군가에게 달려가도록 나를 이끄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 삶의 주인은 나라느니, 운명의 주체가가 되라느니. 그런 모더니즘과 계몽주의의 구호들. 또는 실존주의적인 생의 감각들. 나는 이제 1/3쯤만 믿는다. 오히려 나를 생의 한복판으로 잡아당기는 것은 그리움과 사랑이다.
#0
나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아무런 힘도 없이 까만 어둠 속으로 삼켜져 들어가게 될 뿐이다.
무력하고 우울하고 고통스럽지만 움직여야 한다. 맞서야 한다. 손으로 치우고 만들고 걸어서 사 와야 한다. 먹고 마시고 땀 흘리고….. 살아야 만, 한다. 울음을 삼키더라도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