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자극하는 것은 ‘간접성’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욕망은 가치중립적인 의미로 희망이기도 하고 꿈이 되기도 하는 우리 안의 신비로움이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같은 음악을 들으면, 선율은 아무것도 직접적으로 노래하지 않는 것만 같다. 그저 서정성과 풍경을 묘사할 뿐이다.
남녀가 서로에 대해 호감을 갖고 문자를 주고 받을 때는 간접성으로 주고 받아야 한다. ‘이제 날씨에서 가을 냄새가 묻어나요’라는 문자 하나만 오고 또 다시 이틀 정도 전혀 연락이 없다가 글피 저녁쯤, ‘오늘은 커피를 몇 잔 드셨나요?’라고 짧은 문자가 온다. 그녀는 미스터리함을 쉽게 깨트리지 않는다.
그녀는 고귀한 것을 고귀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아끼는 법에 대해 안다. 그녀는 아름다움을 알고, 그것을 가꿀 줄 아는 사람이다. 소박하고 애달프다.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여지없이 나는 아련해지고 만다.
그 반대가 있다면. 이제 금방 가을이야. 좀 있으면 한 살 더 먹는데 우리 사이 어떡할거야? 똑똑히 좀 말해봐. 그리고 커피 좀 작작 마셔. 밥 안 먹고 너무 그렇게 빵과 커피만 마시면 건강에 안 좋다니까? 진짜 하나하나 다 말해야 돼? 하나하나 다 말하면 안 된다.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것은 하나같이 아름답지 않다. 말하는 것은 터트리는 것이다. 무언가를 말해버린다는 것의 본질적인 성격은 연소와 휘발이다. 팡 터트리는 것이다. 내용과, 그것의 신비와, 그렇게 함으로써, 때로는 관계까지 말이다.
공격적인 push 광고와 컨텐츠 추천, 그리고 영상 정보 그 자체의 해로움에 대해 경계하는 이유는 이런 사유thinking의 프로세싱과 깊이 잇대어 있다. 인공지능의 추천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더욱 짙게 추구하도록 한다.
그것은 나를 더욱 내 안에 갇히도록 한다. 여행하고 산책하도록 하거나, 새로워지도록 하지 않는다. 그런 방향성은 이성적인 사유를 유연하게 하지 않는다.
주지하다시피 sns는 확증편향의 위험성을 안고 있다. 자기들과 비슷한 사람들끼리의 의견과 친목을 강화해 기존의 신념이나 신앙, 사유 방식을 단단히 굳게 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 집에 왜 왔니’라는 놀이를 하듯 제자리를 멤돌고, 이미 한계 지어진 언어들을 주고 받으며 그 안에서 존재의 안전함을 확인하고 위로 받는다. 그런 메커니즘은 Youtube나 Tiktok과 같은 동영상 플랫폼에서도 정확하게 똑같은 이미지로 재현된다. 차이가 있다면 비슷한 준거 집단에 속한 구체적 인물이 없을 뿐이다. 혼자 ‘우리집에 왜 왔니’를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꿈도 없다.’
그런 시간들이 쌓여 나는 우울한 식물과 같이 된다. 본래 품고 있던 모험심과 동물성을 잃어버리고 점점 우울해지다가, 마침내 파멸과 권태의 세계로 이끌린다.
OTT의 시대를 살면서 나는 저렴한 가격에 세상의 모든 DVD를 다 가진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All or nothing이 아니라 All is nothing이다. 여러 개의 가능성이 항상 열려있다는 감각. 그런 느낌은 하나의 영화를 끝까지 보는데 방해가 될 뿐, 집중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모든 여자를 나의 부인으로 만들 수 있는 감각이 나에게서 로맨스를 다 빼앗아가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모든 것을 가져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는 사건의 끔찍함은 거기서(이상ideal의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존재마저 위협한다. 그것은 나의 인격적 특질과 추억, 시간의 독특성을 점진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동일시해 버리고 만다. 그래서 나의 깊이를 빼앗아가 버린다. 아직 닿지 못한 모종의 심연의 가능성을 사멸시켜 버린다.
위 영화를 시청한 사람이 다음과 같은 영화도 시청했어요. 이 영화는 삼사십 대 남자들에게 몇 번째로 인기가 많아요. 때로는 어떤 절대적 권위에 기대서 유명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영화들을 모아 추천해 주기도 한다. 나를 위해 엄선된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의 세상이란, 사실 나를 (집단 지성과, 누군가가 가야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가야할 곳으로, 뻔한 곳으로 인도할 뿐이다.
나의 시간을 아껴주겠다고 자처하며 나의 가능성 앞에 당도하는 영화와 책과 쇼츠 형태의 짧은 영상들은 순간적으로 달지만, 영원에서는 해롭다. 나의 입맛에 따라 정제되고 표백되어 추천되는 콘텐츠들은 나의 코앞에 기꺼이 편하게 투사된다. 설탕처럼 달콤하게 다가오고 소금처럼 나의 시간을 절인다. 그리고 사라져 버린다. 나를 지워버린다. 지독하고 끔찍한 허무함이다.
그러니까, 많은 이야기를 경험할수록 이야기가 닫히는 것이다. 이야기가 나의 개성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깨끗히 씻어낸다. 개성은 바깥을 향하는 자기만의 호기심 같은 것인데, 그것은 환기되고 정화되고 새롭게 됨으로써 강화된다. 자기 위에 자기를 반복적으로 덧칠하는 식의 개성의 강화는 나를 자폐적인 인간으로 만들 뿐이다.
살아있는 동안 살아있는 존재답게 살아있기 위해 나는 어떡해야 할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사회의 관성에 떠밀려 가지 않으려면 나는 단호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열성적인 투쟁을 해야 한다. 싸우려면 힘이 필요하다. 하지만 힘을 얻으려면 먼저 힘을 빼야 한다. 진짜 쉼을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