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없을 때 3
스무 살에 나는 짧은 반바지를 즐겨 입었다. 여름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한겨울에도.
물론 한겨울에는 양심상 무릎 정도까지는 내려오는 나이키 농구 면바지 정도는 입었지만. 이따금 실내 수영장에서 수영을 할 때 수영복 겸용으로 입는 짧은 반바지를 입고 겨울 외투를 하나 걸치고 친구들을 만나러 동네에 놀러 가기도 했다. 겸용이라고 하긴 했지만 사실상 그냥 수영복용, 아니 수영복이었다.
그 짧은 반바지는 아니 수영복은, 밝은 톤의 파란색 아디다스 수영복이었다. 그 수영복을 나는 실내 수영장에 갈 때부터 입고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또다시 입고 수영을 하곤 했다(아마도 그대로 입고 대충 물로만 샤워를 하곤 했을 것이다. 반 바지이자 수영복이었던 옷이었으니까, 모든 것이 올인원이었던 때였으니까.). 그리고 또 그대로 입고 나와서 친구들을 만나서 술을 마시고 놀곤 했다. 심지어는 고등학교 때 사귀던 여자애를 오랜만에 만난 날도 아마 그 차림 그대로 만났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보면 축구나 배드민턴 같은 운동을 할 때 입는 짧은 반바지처럼 보이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나는 그만큼 자유로웠다. 싱그러웠다.
멋있다.
이즈음 자꾸만 어렸을 때가 생각난다. 고등학교 때가 특히 많이 생각나고, 지금처럼 지하철 맞은편 자리에서 꼭 붙어 앉아있는 커플의 남자 청년이 입은 검은색 짧은 반바지를 보게 될 때, 그러니까 청춘을 보게 될 때. 스무 살, 그리고 스물 초반의 때가 떠오른다.
'멋있다.'
스물, 친구들과 무리 지어 한창 만나곤 하던 동네의 동창 여자애가 말했다. 나는 한겨울이었던 그날도 남색 나이키 농구 면 반바지를 입고 위에 화려하게 반짝이는 재질의 미치코 런던 롱 점퍼를 덮어 입고 상쾌하게(?) 나갔다. 친구들을 만나러 서둘러 달려간 곳은 대학로의 한 호프집이었다. 찬 기운을 몰고 그렇게 홀연하고 자유롭게, 밝은 기운으로 나타난 나를 보고 진희가 말했다. 멋있다.
*진희는 예쁜 애였다. 165 정도의 적당히 큰 키에 적당히 예쁘고 적당히 건강한, 그런 친구였다. 그런 진희에게 멋있다는 말을 들으니(누구에게 들어도 항상 기분 좋은 말이지만), 약간 흡족해했던 기억이 난다. 다 기억이 난다. 스무 살. 나만의 세계에 빠져, 아직 주관적이었던(?) 나의 멋있음이 친구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묘하게 더 기분이 좋았던 느낌까지.
맞은편에 앉아있는 남자 청년의 검은색 반바지가 그때 내가 입고 다니던 수영복만큼 짧지는 않았다. 물론 스무 살의 나만한 다리 각선미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남자는 키가 크고 적당히 보기 좋게 통통한 살집을 가졌고 피부가 희었다.
오랜만에 보게 된 사람들과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스타벅스에 앉아 잠시 글을 쓰고 들어오는 길이었다. 찰나의 콧바람을 쏘이고는, 오늘도 또다시 잔뜩 무거워진 기분으로 자취하는 빌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지하철 맞은편에 앉아있는 남자의 반바지가 왜인지 자꾸 눈에 거슬렸다. 남자답게 적당히 조금 벌리고 앉아 있는 건강한 다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안쪽으로 조금 들려 올라간 반바지 때문에(반바지란 늘 그렇듯이) 드러난 그의 하얀색 안쪽 허벅지 속살을 보면서, 생각했다. 자유롭다. 청춘이다. 생생히 살아있는 때.
저 정도 짧기의 반바지는 딱 저 나이 때 즈음(이십 대 초반에서 중반 정도까지) 입을 때 잘 어울리는 것이겠구나. 남자의 반바지도 여자의 미니 스커트처럼 어울리게 입을 수 있는 때란 것이 있겠구나. 혼자 그런 생각을 하며, 남자의 하얀 속살을 잠깐 지긋이 바라보았다. 물론 너무 오래 보면 안 될 것 같아 자연스럽게 잠시만. 눈치가 보인 것은 남자가 아니라 옆에 꼭 붙어있는 여자친구였다.
저 정도 짧기의 반바지를 입고 대중교통을 타는 것 자체가 싱그러운 일이었다.
그는 반바지에, 하얀 티. 커플 쪼리. 나는 발목이 드러나는 길이의 청바지에 검은 로퍼. 군청색 반팔 남방.
옷에서도, 이렇게 가벼움과 무거움이 이미 구분 지어지고 있었다. 물론 나이에서 오는 삶의 무게가 다르긴 하겠지만, 그와 나 사이의 영혼의 경중의 문제는 이십 년 가까이 날 법한 나이 차이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제 카페에서 검은색 한벌 추리닝을 입은 여고생을 보면서 확인했던 나의 무거움은, 나의 무거움은.
여기까지다. 여기서 막힌다. 나의 무거움은. 나의 무거움은.
그것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맺힌다. 무언가 풀잎 끝에 무거운 이슬이 맺혀 풀잎이 무겁게 기울어졌지만, 떨어지지도 증발되어 날아가지도 않는 무거운 물방울처럼, 내 명치에도 무언가 무겁고 짠 물방울이 가득 맺혀 나를 무겁게 하고, 새로운 생으로 날아가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다고 이 무거운 물방울을 떨쳐버리고 싶은 것도, 이 물방울을 벗어버리고 훨훨 날아가 버리고 싶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이 날아가 버릴까 노심초사 전전긍긍 한다. 이 물방울을 나는 아낀다. 이것을 소중히, 소중히 영원히 머금고 싶기만 하다.
이것을 머금은 채 고등학교 때처럼, 스무 살 때처럼 살아있다는 감각까지 회복할 수 없을까 희망한다면 몰라도(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이것을 버려야 한다면, 이제 살아있다는 감각까지 버릴 수 있는 각오가 충분히 되어 있다. 나는 이 불안과 슬픔을 소중히 여길 뿐 아니라 어쩌면 사랑하게 되어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을 머금고, 이것을 이해해 나가며, 나 자신을 이해해 가며 쉬고 싶다. 다만 살아있어야 하는 때까지-너무 오래지 않게-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며 살아있고 싶다. 지금은 오직 이러한 지향만이 나의 삶의 지향이자 글쓰기의 지향이다.
파란색 미치코런던 롱 점퍼가 그립다. 아디다스 수영복과 나의 생기 있던 웃음들.
그 옷들은 대체 다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마술처럼 불가해하기만 한 시간들이다.
*돌아보니까 그렇다. 그때도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느낌으로 예쁘지는 않아서, 그렇다고 또 건강하고 밝으니까 매력은 느껴지고. 그런 정도의 레이어layer에 있던 애였다. 또 나는 그때 사귀기 직전이거나 이미 사귀기 시작한 여자 친구가 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