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고
부서지며,
블랙홀로 빠져들어가는 나의 안식의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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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쉴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좋아한다기보다 필요로 한다고 해야할까. 아니, 그리워 한다. 이제 그것은 차라리 그리움에 가깝다. 쉼에 관한 한 그리워한다는 말이 내 마음과 가장 가까운 표현인 것 같다. 쉼이 그립다. 쉴 수 있는 사람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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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그렇고, 공간이 그렇고, 또 글이 그렇다.
사람은 예컨대 나에게는 김영하 작가가 그렇다. 실제 인물은 그렇지 않을 수 있겠지만-아마 내가 생각하는 이미지만큼 쉴 수 있는 사람은 아닐 테니까. 아무리 이상적인 쉼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쉴 수 있게 하는 사람의 ‘이데아’는 아닐 테니까. 결코 엄마처럼 그럴 수는 없을 테니까.-,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내 앞에 또는 어딘가에) 있고, 그 사람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그 감각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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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수 교수(피아니스트)가 그렇다.
그도 역시 실제로 만나면 예술가답게 섬세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가져서 내가 너무 조심스러워져 쉴 수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그가 하는 바흐 연주에서 나는 정말 대나무 숲이나 편백나무 숲에 온 것처럼 깊은 숨을 들이쉬고는 하니까. 그는 아무튼 내게 ‘쉴 수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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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냄새가 나는 교회도 그렇다.
(삼백 석 크기 정도의) 너무 장엄하지도, 너무 작아서 답답하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예배당에 들어가면 칭얼거리며 파고들어 안기고 싶은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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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학원이 그렇다.
학원에서 선생님이 앞에 서서 분필로 무언가를 칠판에 적고, 아이들이 착하게 앉아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보면 왜인지 모르게 뭉클하다. 이런 생각은 십여 년 전 인도에서의 추억에 기인한다. 그것은 혼자 길을 다니다 우연히 보게 된 한 장면이었다.
해가 서서히 저물어가는 늦은 오후였던 것 같은데, 하필 아마 매직 아워(노을이 대지를 붉게 물들이는 찰나의 시간) 시간대였을 것이다. 어느 건물의 1층에 있는 작은 교실에서, 인도인 여자 선생님이 앞에 서서 칠판에 무언가를 적으며 열심히 진심을 다해 가르치고 있었다.
아이들은 선생님을 바라보고, 열심히 들으며, 무언가를 받아 적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이방인이었던 나에게는 너무 신기하고 아련하게 느껴졌다. 이상하게 설레고 뭉클했다. 그 기억이 동결되어 지금까지 마음 한 구석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순간으로써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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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서점이 그렇다.
서울 시내 곳곳에 있는 중고 서점의 계단 의자가 그렇다. 계단 의자에 앉아 그냥 읽고 싶은 책을 읽는 순간이 그렇다. 아무 숙제도, 부담도, 의무감도, 방향성도, 지향도 없이 그저 표지나 제목이 궁금증을 일으키는 책들을 한 바구니 담아와 한 권씩 꺼내서 훑어보거나 예상치 않은 문장들에 홀려 빠져드는 순간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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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운동장이 그렇다.
학교가 파하면 가방을 던져놓던 운동장의 큰 은행나무 밑동(나무 아래 밑동 위에 흙을 채우고, 시멘트로 동그랗게 테두리를 세워놓은 나무 아래 흙더미가 있었다.). 그 위에 가방과 실내화 주머니를 던져 놓고 광활하게만 느껴지는 운동장을 누비며 뛰어놀곤 했다.
정돈된 인조잔디 운동장이 아닌, 모레 흙 바람이 날리는 정겨운 운동장. 아무도 없는 탁 트인 운동장의 풍경. 또는 아이들 몇몇이 한쪽 구석의 축구 골대에서 축구를 하고 있는 장면을 고즈넉하게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보면 나는 뭉클해지며 일순간 눈시울이 붉어진다.
어린 시절 뜨거운 숨을 내쉬며 온몸으로 숨을 쉬던 곳에서, 이제 나는 가만히 앉아, 다만 고요한 풍경을 바라보며, 그때와는 달리 조금 부족한 농도의 산소나 이산화탄소가 섞인 숨을 쉰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너무나 이상하고 낯선 숨이기만 한 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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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글이 그렇다.
왜인지 나는 자꾸만 글을 쓰는 시간으로 도피하려고 한다. 글을 써나가는 순간, 사나웠던 호흡들이 잠깐 진정한다. 글을 쓰는 순간이 시간의 성소가 되어 가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점점 더 그것에 더 의존한다.
글을 써나가는 순간은 점점 더 나에게 핑계이자 젖가슴이자 옥탑방이 되어주고 있다. 이게 없었으면 나는 어디서 깊은숨을 쉬었을까. 숨통과 같은 것이 되어주고 있다. 또는 헤어지면 살 수 없을 것만 같은 첫사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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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고 싶은 공간과, 시간, 사람.
그것들의 공통점은 아무것도 없거나, 정반대로 오직 본질뿐이라는 것이다.
텅텅 빈 것만 같은 공간과 시간과 사람.
아무 형식과 규율과 모범성도 없는 것들이. 무중력 상태의 암흑과 같은 공간과 시간이. 나에게 아무런 지도도 하지 않고 아무런 지침도 없고 어떤 교훈과 깨달음도 의도하지 않는 사람이, 이제는 나를 쉬게 한다(가령 어린 아이나, 외할머니나, 사랑뿐인 엄마처럼.).
그런가 하면 역설적이게도 본질 뿐인 순간들 속에서 쉼을 느낀다. 바흐의 단조로운 평균율처럼 마지막 단위의 본질과 같은 공간과 시간에서 나는 깊이 숨 쉴 수 있다. 또는 그만치 고지식한, 때로는 외골수와 같은 면마저 보이는 지성과 성격적 지향을 가진 사람 안에서 나는 쉴 수 있다. 반대로 그 사잇 공간에서 정체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은 나를 힘들게 한다. 때로는 답답하게 하고 화나게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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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쉼을 느끼는 것들은, 모두 나로 하여금 깊은 숨을 쉬게 한다.
그러니까 반대의 사람, 공간, 시간들은 숨을 막히게 한다. 그것들로부터도 많은 것들을 배우고 얻지만, 기회비용을 생각했을 때 나의 시간을 팔아 숨 막혀하며 무언가를 배우고 느끼는 일이 그렇게 좋은 거래는 아닌 것 같다. 또 나에게 필요한 것일지 아닐지도 모를, 미지의 새로운 배움과 느낌을 위해 하루하루를 내던지기에 인생은 너무나 짧다.
이제 나는 아무것도 없는 시간이나 하나의 단단한 씨앗만 남은 시간, 또는 그 둘 사이를 농담처럼, 울듯, 웃듯 오고 가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 너무 무겁지 않게 낄낄낄 웃으며, 또 소리 없이 흐느껴 울며. 그러다 안 되겠으면 떼쓰며 울며. 울며 불며.
그것들 외의 시간들은 비효율적이라든지 시간 낭비라고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 외의 시간들과는 함께 할 수 없다. 나와 그것은 허무하고 공허한 이질감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나의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깊은 숨, 눈물겨움. 떨림. 기쁨. 그런 것이 나의 쉼의 본질적인 성격이다. 본질마저 다 깨트리고 깨트려, 나의 쉼을 완벽히 분해하면 마지막 단위의 원소에는 칭얼거림이 나올 것이다. 불타 화장되면 나는 칭얼거림만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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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쓰기나 사랑, 모든 관계와 집 꾸미기와, 좋아하는 음악들까지.
사역과 독서와 공부와 좋아하는 지휘자와 연주자, 향수나 음식마저도.
모두 칭얼거림을 향해, 쉼을 향해, 그것들을 향한 그리움을 향해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블랙홀처럼.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가는 우주의 파편들처럼, 그것들은 죄다 무엇이 될지 모르는 채, 이토록 쉼을 그리워하는 순간들 너머로 아득히 사라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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