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잠시 새로운 브런치북에 대한 소개를 펼쳐보려 한다.
이 브런치 북은 사놓고 읽지 못한 책들을,
정확히 말하면 펴지도 못한/않은 책들을
한 권씩 펴 들어 책들의 속삭임을 들어보려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먼저 밝힐 것은.
이 연재는 내게 너무나 무리한 시도다. 나는 결코, 내가 가진 모든 책들의 첫 페이지를 펼쳐 보지 못할 것이다. 집에 쌓아놓고 있는 책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은 이 연재가 가려는 길과 너무 넓은 간극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또한 심각한 문제인데, 나는 정말이지 꾸준하게(steadfastly)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성정이 되지 못한다. 어떤 일의 진행 중에 내가 선택해서 하고 있는 일이 그다지 재미는 없다는 것을 뒤늦게 느꼈다면, 아마 그날은(혹은 늦어도 그 주간은) 내가 그 일을 그만두게 되는 날이 될 것이다. ‘시작했으므로 억지로라도 끝내야 한다.’는 격언은 나에게로 와, 지저분한 식당에서 입가를 닦고 테이블 위에 올려둔 앰보싱 냅킨보다 값어치 없는 생각이 되고 만다.
이러한 면모는 나의 빛과 그림자다. 흥미를 느끼는 일에는 누구 못지않은 열정을 영혼 깊숙이 품는다. 하지만 무언가에 대한 흥미를 오래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점이 결정적인 문제가 된다. 치명적이다. 필자에게는, 어떤 대상과 일정한 시간(대개는 짧다.), 경험하고 느끼고 탐구하면서 교제를 이어가다 (정말 깊고 넓은 암흑과 매혹의 세계가 아닌 이상) 어떤 임계점을 넘으면, 어떤 대상을 마치 다 알아 버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차갑게 뒤돌아서는 냉혈한적인 성격이 있다. 아마 나는 한 세 권 정도를 쓰고 연재를 조기 폐간할지도 모르겠다.
또 이 모든 이유 못지않게 연재의 지속을 위협하는 요소가 있으니. 그것은 필자의 우월주의적 이상론 경향이다. 충격적이겠지만 필자는 서평 루팡 전문가다. 이유야 필자의 비도덕성 등 많은 것들이 거론될 수 있겠지만. 중요한 한 원인은 나라는 사람이 책을 정말 정직하게 꼼꼼히 음미하고 어떤, 놀랄만하고 깊이 있는 서평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순수한 마음과 성취욕이 뒤섞인 선의를 갖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희망을 넘어 (정직성과 연결된) 어떤 강박의 무늬마저 만들어낸다. 나는 훌륭한 사람이고, 따라서 나는 훌륭하게 읽고 훌륭하게 써야 한다. 나는 범인( 凡人. 무릇 범)들처럼 대충대충 살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나는 책장을 한 페이지도 펼쳐 보지 않고 다른 일들을 정말 열심히 한다. 미루고 미룬다. 하지만 머릿속 한 구석에는 서평이 차지하고 있다. 그러다 (이제는 꼭) 써야만 한다는 목적의식이 더 강하게 작용할 때는 쫓기듯 황급히 책상에 달려가 앉아 읽은 체하고 대충 서평 글을 쓰기도 했지만. 이 조차 굉장히 드문 사례일 뿐이다.
나는 책을 받고, 잘 써야 할 텐데, 그래도 어느 정도 진지하게 책의 고들빼기는 뽑아 읽고 서평 글을 써야 할 텐데. 오늘은 읽어야 하는데. 생각하며 책을 가방에 넣고 다닌다. 그 과정에서 새 책은 약간 닳거나, 약간 정도가 아니라 가방 속에서 뒹굴다 텀블러에 담긴 커피로 강제로 샤워를 하기도 한다. 때로는 차가운 샤워였고, 때로는 화상을 입고도 남을 만큼 뜨거운 샤워였다. 새벽의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큼한 바람.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래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나는 그런 복잡하고 첨예한 프로세스를 거쳐 출판사에서 보내는 책의 첫 장도 펼치지 않는 파렴치한이 되고 만다. 마침내 서평을 올려야 하는 기한이 지나 이제 영원 속으로 사라진다. 모두 끝난 것이다.
오호츠크해 기단처럼 거대한 흐름으로 나를 밀고 나가고 있는 (이토록 독특한) 내 안의 관성을 비틀어 위트 있게 압력을 빼려는 의도도 아주 조금은(아주 큰 기대감은 없이) 섞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너무 흔해빠진 말이지만 반대정신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완벽히 읽고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의 얼룩을 최대한 박박 지우고-하지만 안 지워지면 안 지워지는 대로 얼룩은 그대로 남겨놓고- 써보는 것이다.
대충 읽고 최대한 편한(easy and cozy) 마음으로 읽고 쓰고 있는 나를 느껴보고 싶다. 미용실에서 파마를 말고 앉아 펼쳐보는 잡지처럼 읽어야지. 다짐해 본다.
그러나
잡지처럼 보리라. 파마처럼 말아 읽으리라. 이런 다짐은 어쩌면 너무 경직되고 진지한 나의 성격 탓에 피도처럼 쉽게 물보라를 일으키며 사라져 버릴지 모른다. 그것을 제재하고 상기시킬 질서(조금 더 강력한 힘을 가진 무언가의 의미로 사용한 단어인데 충분히 그 맛을 살리지 못한 표현이 되고 있다. priciple, cosmos, order, canon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자연법칙에 가깝게 수렴하는 강한 강제성이랄까.)가 필요하다.
따라서,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첫째, 서문은 읽지 않고 첫 문장부터 읽는다.
둘째, 읽어나가는 동안 재미가 없거나 (체력적으로 소진되어) 힘이 들거나 기타 이유로 책장을 덮으면 그냥 무조건 그 책에 대한 인상을 쓴다(쓰기 시작한다. 지체 없이 이첩.) 마치 이건 사람을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며 커피 한 잔을 하다가, 잠시 화장실에 가서 그 사람 몰래 그에 대한 인상을 메모장에 쓰는 일 같은 것이다. 사람에 대한 첫인상이란 매우 강렬한 순간이지만, 그만큼 휘발성도 강하지 않은가. 그 순간에 날카롭게 파고든 인상을 언어로 번역한 문장과 단어를 새겨 넣지 않으면, 누군가의 첫인상을 소장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 되고 만다.
누군가를 어느 정도 만나면서 만남의 횟수가 퇴적층처럼 누적되면, 첫인상의 기억은 변색되도 한다. 시간의 직사광선을 맞으며 빛이 바래다가 급기야는 사라지고 말기도 한다. 대부분의 경험이 그렇듯이 말이다. 시간 속으로 날아가버리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휘발성보다 각인성(필자가 만들어본 용어로 각인하는 힘.)이 더 강할 수도 있지만 드문 경우에 그러할 뿐이다.
세 번째 원칙은, 결코 책을 끝까지 읽지는 않고 쓰겠다는 다짐. 네 번째 원칙은 진지하게-힘들여서, 척추 꼬리뼈를 곧추세우고- 읽지 않겠다는 다짐.
그러니까 이것은 삶에 대해서 뿐 아니라 책에 대해서도 관조적이고 희석된 태도로 관찰하겠다는, 의지의 한 표현이다. 나는 너무 쉽게 어떤 감정에 빠지고, 또 너무 경직되어 그것에 몰입하는 태도로 살곤 했는데. 그건 존재의 문제이기도 했다. 따라서 너무 진한 에스프레소 같이 쓴맛만 강조된 듯한 나에게는 어쩌면 적당한 비율의 물의 희석이 필요하다. 물의 해석이 필요하다. 또 다른 에스프레소의 해석이 아니라.
이렇게 마트에 꼰파냐에 쓸 생크림을 사러 가기 전에 서둘러 속기한 시리즈에 대한 기자 회견이다. 하지만 아마 안 될 것이다. 미용실처럼 읽겠다는 나의 희망은 아마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시리즈도 못 쓸 것이다. 다 안 될 것이다.
쌓여있는 책탑 아래에서 왜소한 체구로 깔려 가녀린 호흡을 이어가고 있는, 미백의 책을 구하기 위해 나는 위에 쌓인 책들을 두 손으로 집고 다 옆으로 옮겼다. 그리고 한 권의 책을 구조했다.
책의 상태 : 별 네 개. (옆 면과 전면 표지에 아이 입가에 묻은 짜장면 색깔 같은 무언가가 책의 풍미를 더하고 있다. 내부는 무척 깨끗해 책 냄새마저 살아 있었다.)
생크림과 생필품을 사려고 마트를 가려다 멈추어 선 채, 왼쪽 어깨에 검은 가죽 가방을 메고 서서 (거의) 일필휘지(?)로 썼다. 생크림이 녹아 사라지기 전에 자전거를 밟고 달려야 한다. (필자 주: 내가 너무 늦었는지, 염원하던 생크림은 없었다.)
* 그리고 깨닫는다. 역시 나는 좋아하는 것을 하고 살아야 하는구나. 좋아하는 글을 써야 하는구나. 나의 한 호흡은 3000자 정도구나.
아무튼 첫 책은 < 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