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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의 지배

by jungsin





눈가에 조금만 닿았도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시큼한, 알코올 성분이 진하게 들어있는 애프터 쉐이브.

맨살에 기분 좋게 스쳐 닿는 정장. 걸을 때마다 구둣발 소리가 묵직하게 나는 검은색 옥스퍼드 구두.

단조의 파이프 오르간 소리와 오래된 첼로 소리.

기분 좋은 긴장감과 스케일 있는 장엄함.

스크린이 옆으로 넓은 시원하고 캄캄한 영화관.

팀블러에 담긴 적당히 쓰고 깊은 풍미를 가진 아이스 커피. 알이 크고 동그란 검은색 금속테 안경.

파파야 네 개. 샐러드. 야채 고기 고로케. 무화과 크림치즈.


영화 스펜서(Spencer)




즐거워도 괜찮고, 초조해도 괜찮고,부끄러워도 괜찮고, 창피해도 괜찮다. 화가나도 괜찮고 걱정돼도 괜찮다.

괜찮아도 불안하고, 불안해도 허무하다. 괜찮다.

설레도 허무하고 우울해도 허무하고 맛있어도 허무하니까.

괜찮다.

지배자는 허무주의다.

낱개의 모든 감정들을 허무함이 꼭 붙들고 있다.

눈물이 말랐다.

웃음도 핏기도.

카페의 낮은 소파에 마주 앉아서 스마트폰 하고 있는 남자와 사슴처럼 목을 길게 빼고 멀뚱멀뚱 앉아있는 여자.

핵심이 빠지고 평화로움만 남은 중년.


핵심에 몰입되어, 엉겨붙듯 옆으로 나란히 앉아있는 스물 언저리의 두 남여 아이들.


어느 쪽이든 허무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차가워져야 하는데 뜨겁기만 하다. 뜨거운 사람이었는데 차가워져 간다. 그러니까,

내가 선 곳은 없다고도 말할 수 없고

어디에 있다고도 말할 수 없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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