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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gsin Sep 15. 2023

매혹되어 얼어붙음

사랑에 빠진 여자가 갖고 있던 힘에 대해서


살아있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


이렇게 세 번 연속으로 써 본다.

‘살아있다는 것’을.



나는 영화의 한 장면으로 들어간다.


장소는 서양의 한 대학 강의실이다.


좋아. 그럼,

나와서 자신 있게 자작시를 읽어볼 사람?

(문학 수업에서 자작시를 읊는 시간은 서양의 강의실도 역시나 다를 바 없이 서로 떠넘기는 분위기다.)


I will. 저요.

(북유럽 여자처럼 광대에 주근깨가 약간씩 나있고, 광대가 뾰족한 여학생이 손을 들며 ‘아이 위얼.’ 이라고, 덤덤하고 차갑게 말한다.)



또 너냐? 들어보자.

(할 사람이 없으니 할 수 없다는 듯 교수는 그녀의 낭송을 허락한다.)



(큰 스프링이 가운데 투박하게 박힌, 짙은 청색 대학 노트를 들고 걸어 나온다.

담백하게 반짝이는 금속 징이 알알이 박혀있는 얇은 소재의 흰 블라우스에, 길고 얇은 자색 치마를 입고.

페미닌한 옷차림이다. 대학 노트의 스프링만한 크기의 엷게 빛나는 금속 링 귀걸이 세 개를 했다. 굵게 컬이 진 금발머리를 귀 뒤로 넘겼지만 수더분하고 청순하게 흘러내린 옆머리결 앞으로, 오른쪽 귀에 걸린 귀걸이 두 개가 애절하게 흔들린다.)


(그것의 이름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라떼 아트의 로제타 무늬를 닮은 땋은 머리가 등 뒤 중간 선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하고 있다.

대학 노트를 펼친다.

내려간 오른쪽 앞머릿결을 한번 쓸어 넘긴다.)


난 당신이 하는 말도

머리 스타일도 싫어요.



차를 모는 방법도

쳐다보는 눈길도 싫어요.



당신의 그 무식하게 큰 부츠도 싫고

내 마음을 다 읽고 있는 듯한 느낌도 싫어요.



난 당신이 정말로 싫어요.

그것은 날 아프게 하고

심지어 이렇게 시까지 쓰게 만들어요.

(여자는 이 부분을 마치 국어책을 읽듯, 또 남의 시를 읽듯, 시의 라임을 타며 읽는다. 애써 감정을 가볍게 희석시키듯. 심지어 비꼬는 투마저 느껴지게.)  


(여기서 한숨을 한 번 깊게 내쉬면서. 계속 읽어나간다.)



당신이 늘 옳은 말을 하는 것도

거짓말을 하는 것도 싫어요.

(여자는 여기서 약간 흔들린다.)



당신이 날 웃게 해줘도 싫지만

(여자의 시선이 오른쪽 어느 한 자리를 향한다.

그쪽을 흘겨보듯 바라보며 읊는다.)

날 울릴 땐 더더욱 싫어요.

(울먹임 같은 그르렁거림이 별 수 없이 새어 나온다.)



곁에 없는 것도

연락을 안 하는 당신도 싫어요.

(이 시구절부터 울음 참기가 불가능해져 아예 울먹이며 읽고 만다.

아까 그 남자를 흘겨보면서.

시를 거의 외운 듯

이제 강의 노트에 시선도 잘 두지 않고, 그를 바라보며 계속 읊는다.)



그런데 그 중에 제일 싫은 건 그런 당신이 싫지 않다는 거예요.


하나도, 정말 하나도 좋은 게 없어요.


(카메라가 남자의 표정을 클로즈업 해 비춘다.

남자는 동공이 커져 그녀를 바라본다.)


(여자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울먹이며 강의실 뒤로 나가버린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의 시 낭송을 듣는 사이 어떤 세계로 점점 빠져들어 버렸다.

계속해서 거의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잠긴다.)



나도 멈춰버렸다.


무언가에 낭낭하게 잠겨버린 그 여자의 시를 듣다가,

그녀가 강의실을 나간 순간에서, 멈춰 버렸다.


남자처럼 계속 생각에 잠겼다.


내가 저렇게 살아있던 때가 언제였지.

저 여학생처럼 허우적거리던 날이 언제였지.


바닷물처럼, 오이지처럼 헤어나올 엄두도 내지 못할만큼 버거운 사랑에 짜게 절여져 있던 날들이 언제였지.


저 여학생은 저렇게 울면서 교실을 나가고,

나는 그러면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여자는 힘이 셌다.

여자에게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아름다울 수 있었다.

그녀의 사랑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했던 남자도, 나도 그녀의 어떤 힘에 반해 넋을 잃은 것이었다.

 


1998년에 고요한 자취방 원룸에서 비디오 테이프로 보았던 제리 맥과이어 이후로. 그러니까 제리 맥과이어가 전속력으로 달려 도로시 보이드의 집에 찾아가 이혼녀 모임의 시끄러운 수다 소리를 헤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도로시를 부르던 장면 이후로 이렇게 한 장면을 계속해서 반복해 음미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한참 머물러 생각해보게 되었다.


밍밍한 물김치와 같은 나의 날들에 대해.

싱거움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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