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아침의 큰 머그컵
John Beck.
그는 이른바 영어 회화 선생님이었다. 그는 분명 고등학교 때 선명한 나의 ‘영어회화 선생님’이었음에도 이른바-라고 말하게 되는 이유는, 그를 기억하는 나의 인상의 방식 때문이다.
한 주에 두 번인가. 나는 과 친구들과 함께 시원한 복도를 지나 한 층 아래의 회화실로 이동해야 했다.
여느 고등학교 수업이 그렇듯 한 주의 일정은 각종 수업으로 빼곡히 차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수업은 네모난 교실에서 가만히 앉아 멍하니 칠판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는 수업이었다. 교실 앞 오른쪽 벽면에 붙어있던 시간표에는 아침 7시 반에 시작해 저녁 7시에 끝나는 회색 빛 수업들이 Mon. to Sat. day, 위에서 아래로 지겨운 직립을 이루며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하루종일 가만히 앉아 멍하니 칠판을 바라보는 일은 신성한 의무인양 여겨졌다. 거의 대부분의 수업 시간에 그래야만 했다.
영어 회화 시간은 작은 구원이었다. 나는 영어 회화 수업의 직전 시간이 되면, 황망하게 반짝이는 셀룰러 판으로 싸여 있는 시간표의 수많은 수업 스케줄 속에서 영어 회화 원 또는 투만을 노려보고 있곤 했다.
……. 영어회화 I …. blur blur 영어회화 II
2층의 작은 회화실에는 오른쪽 창가에서 따듯한 볕이 들어왔다. 하지만 문을 탁 열고 회화실에 들어가면 느껴지는 첫 공기는 약간 서늘했다. 수업이 없을 때는 그 공간을 잘 사용하지 않아 교실보다 온도가 조금 낮았기 때문이다. 약간의 서늘함은 영어 회화 수업에 대한 긴장감과 기대감을 살짝 더 고조시켰다.
회화실 안에는 책상과 의자가 붙어있는 일체형 책걸상이 스무 개 정도 놓여 있었다. 교실은 앞뒤가 짧고 옆으로 넓게 열려있는 구조였다. 책걸상은 교실에 있는 것보다 조금 더 작았고 모서리 테두리나, 모든 면면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되어 있었다. 우리가 상주하던 교실은 모든 것이 네모났는데, 회화실에 있는 것은 모든 것이 다 둥글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이 둥글해졌다.
열일곱의 나에게는 작은 교실의 그런 모든 감각들이 생경하고 퍽 설레는 것이었다. 그곳의 모든 것은 우리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 공간의 느낌들이 하나같이 우리의 교실 분위기와는 달랐기 때문인데, 회화실 안에 있는 모든 것들 중에 3층의 상주 교실의 감각들과 가장 다른 것은 존 백이었다.
그는 이따금 우리가 정돈되어 앉아 있은 뒤에, 또는 정돈되었을 뿐 아니라 기다리기 지겨워지고, 지겨워지다 못해 나른해져 책상 위에 엎드려 쉬고 있을 무렵 무거운 콘트라베이스처럼 나타나곤 했다.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늘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가끔 복도에서 전체 수업 종이 울리고도 오 분이나 십 분쯤 늦게 들어오곤 했다. 여유로운 걸음으로 나타나, 땅을 뚫고 들어갈 정도의 아주 낮은 음으로 굿몰닝… 에브리원. 인사했다.
약간 헐렁하게 혁대를 맨 청바지. 진Jean 안에 대충 구겨 넣은 옥스퍼드 체크무늬나 파스텔 톤의 남방. 눈과 입술은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처럼 한껏 쳐져 있었고, 입술은 놀라울 정도로 두꺼웠다. 처음에는 그의 모든 것이 너무 낯설고 신비로워 흡- 하고 숨이 막힐 정도였다. 동양의 작은 반도 국가의 작은 고등학교, 3층 복도 끝에 있는 네모난 교실. 그토록 한정된 공간이 내 전체의 세계인 것으로만 알고 숨막혀 하던 나에게 그는 수십 년 뒤까지도 파장을 일으킬, 하나의 충격파였다.
아침의 회화실에 들어오는 그의 손에 언제나 들려있는 큰 머그컵. 커다란 머그에서 알 수 없이 피어오르는 김은 작은 회화실을 금세 고소하게 물들였다. 분명 커피는 커피일 텐데, 그의 커피는 우리가 마시는 커피와 어딘지 많이 달라 보였다. 그때는 그것이 지금은 ‘아메리카노’라고 불리는 미국식 커피인 줄도 몰랐다. 아니, 몰랐다가 아니라 없었다고 해야겠다. 아직 우리가 야간 자율 학습을 가지 않은 날이나 주말에 가던 곳은 카페가 아니라 커피숍이었다. 그리고 커피숍에 있는 것은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그냥 COFFEE였다. 커피숍에는 그냥, 쓴 커피나 설탕 커피, 또는 납작하고 넓은 잔의 테두리에 설탕 알갱이가 붙어있는 아이리쉬 커피 등이 있긴 했지만 그가 마시는 커피는, 이따금 내가 여학생들과 마주 앉아 맛도 모르고, 단 맛에 홀짝거리는 커피와는 하여튼 어딘지 달라 보였다.
한 주에 겨우 두 번. 당장 도망가고 싶을 만큼 나른하고 지겨운 열일곱의 아침이면, 모락모락 피는 김 안의 원천fountain이 나의 호기심을 무제약적으로 자극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아주 큰 머그컵,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홍채가 커질 정도로 휘둥그레하게 큰 머그컵의 둥근 테두리 안의 세상. 여유롭게 걸어다니며 느리고 굵은 목소리는 내는 존 백. 작은 화이트 보드에 써나가던 낯선 언어들과,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던 두꺼운 목소리. 느릿느릿한 말투. 그의 모든 독특함들. 그것들이 지금까지도 나의 한 성질을 규정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오브제가 되고 있다.
언젠가 그는 커피 서버를 아예 통째로 들고 영어 회화실에 들어왔다. 그리고 오른쪽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커피 맛을 보고 싶은 사람은 이 뒤로 일렬로 줄을 서보라고 했다. 아마 거의 모두가 줄을 섰을 것이다.
우리는 줄을 서서 존 백 선생님이 따라주는 커피를 마시는 일을 일종의 미국 문화 체험 같은 것으로써, 수업의 어떤 연장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선생님이 그날따라 우리에게 영어 회화를 가르쳐 주는 일을 흥미롭지 않게 느껴서 적당히 수업 시간을 떼우고 싶었던 것인지, 혹은 제국주의적 문화 우월주의를 갖고 즉흥적으로 그런 이벤트를 벌인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우리는 종이컵을 들고 얌전하게 줄을 서서, 존이 따라주는 미국식 커피를 한 명씩 차례대로 받아 마셨다. 신비로운 씀이었다. 우리는 회화실을 돌아 나서며 목소리가 울리는 복도에서 그 커피가 어땠는지 신기한 기분으로 떠들어댔다.
그가 나를 아직까지도 설레게 하다니. 놀라운 일이다. 그는 아직도, 꿈결처럼 설레는 것으로 남아 나의 세계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쓰고, 엷고 고소한 아메리카노로써. 두렵고 긴 겨울날이 시작되고 있는 듯한 어스름한 오후. 막막할 정도로 움츠러들고, 녹아 사라져버리고 싶은 일요일의 오후. 더 이상은 하루도 더 살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으로 침잠되어 갈 때, 그러한 날들에 커피의 증기처럼 구원자로 나타나 고소하게 피어오른다.
굿모닝 에브리 원. 왠 유 필 글루미? 돈 비 샤이, 미샤엘. 두 유 워너 테이스트 으어 컵 옵 컵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