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영등포에 당도했다. 차 문을 열고, 길거리에 발을 디디고 걷기 시작했다. 숨이 막힐 듯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 후드득, 때마침 머리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여름날, 여섯 시 정도였으니 날은 아직 한창 밝았는데.
하늘이 약간 미간을 찌푸려 두꺼운 비를 흩뿌리는 날씨.
더위, 습기, 비.
분주히 오고 가는 퇴근러들을 헤치고 버스환승센터까지 달려가는데, 이런 분위기와 거리의 냄새 같은 것이 꼭 동남아 같다고 느껴져 약간 감성에 젖을 뻔했다.
러시 아워의 서울 버스는 역시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몇 정거장 후 내가 서있던 자리, 바로 앞 넓은 자리가 비었다. 그 장면을 보고 사람들을 헤치고 오려 마음을 먹은 젊은 여자의 눈빛이 오른편의 사람들 사이에서 보였다. 하지만 난 너무 피곤해 그냥 내 앞의 자리에 앉아 버렸다(평소에는 여자가 앉고 싶어 하는 걸 보고 이렇게 단호하게 행동하지는 않는 나이지만). 그리고 그렇게 얼마 지나 바로 잠들어 한참을 깊이 곯아떨어졌다.
깨어나 두리번거려 보니, 다행히 아직 광화문에 닿기 전이었다. 서점에 들러 드디어 주문해 두었던 책을 받았다. ‘달의 의지’.
“너라는 중력에서 벗어나 나의 정상궤도에 오르다. - 관계의 끝에 선 사람들이 서로의 불편과 불안에 관해 말하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작가도 잘 몰랐고, 여전히 문학도 잘 읽지 않아 소설도 몰랐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달을 다루었다면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늘 그랬듯 사자. 사는 것이 곧 남는 것이니-란, 묘하게 달콤하고 해괴한 생각을 가진 나였다.
아마 작가는 관계를 다루는 이야기의 상징으로 달을 다룬 것 같았고, 달도, 관계도 나의 핵심적인 관심사니까, 그럼 사야지. 이토록 얇은 책이니 설마 언젠가는 읽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안 읽은 채 하나님 품에 안긴다 해도 하나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시간은 어느덧 밤을 향해 가고 있었고, 나는 정말이지 찌뿌둥한 피로감에 젖어 있었지만, 바로 자취집으로 가지 않고 학원을 알아보기 위해 나고 자란 나의 동네에 내렸다. 역시 도시. 그곳의 생기를 또다시 한 움큼 삼켜 입에 물고 있게 되었다. 이곳에 살 때 기분이 좋은 날 들르곤 하던 익숙한 빵집에 들러 칠곡 식빵을 사들고, 스타벅스에 들러 투샷을 추가한 아아와 함께 빵을 뜯어 삼켰다. 아.. 이 도시의 맛. 그래 이 맛이야. 그것은 가히 찰나의 순간이었다. 나는 혼자서, 오직 나만 알고 있는 시간 여행을 하고 있었다. 고소하고 달콤하고 시원하고, 시큼한.
밤늦게 들어와 바로 샤워를 하고, 바람이 부는 모든 기기를 틀어놓고 누워 쉬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배가 고팠는데. 정말 배가 고팠는데. 꼭 뭘 좀 먹고, 자고 싶었는데.
밤새도록 한없이 한없이 잠에만 빠져들었다. 아득한 감각의 저편에서, 어떤 배고픔을 기억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