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ngsin Mar 27. 2024

지금에 대해서



인생은 지금,  시간에 대한 것이다. 언제나 그렇다.  번도 미래나 과거의 시간을  적이 . 그럴  없었다. 1 전을  적도 1 뒤를  적도 없었다. 항상 지금만을   있었다.




어느덧 눈이 노화되기 시작했는지 안경을 쓰지 않으면 이 하얀 노트북 화면조차 뿌옇게 보인다. 자전거를 탈 때는 그래도 빨리 달리려면, 주변을 또렷이 보고 시야를 장악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안경을 쓰곤 했다.


그런데 이즈음은 안 쓰는 것이 오히려 더 편하다고 느낀다. 안경을 쓰지 않으면 나의 시야는 약간 뿌얘진다. 그래도 아직 최악의 시력의 상태는 아니어서, 그 속에서도 물체의 움직임은 다 포착된다. 하지만 뿌옇게 보이면 자신의 시각의 인지력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며 어쩔 도리 없이 약간 불안해진다. 바로 그 불안함의 느낌을 나는 오히려 더 좋아하게 되고 있다.


신비롭게도 그렇다. 불안함은 편안하다. 시각의 뿌연 감각은 심리적인 편안함 외에도 실제적인 삶의 감각에도 더 좋다고 느낀다. 그것은 안전한 감각과도 관련이 있다. 뿌옇고 불안한 느낌은 (적어도 자전거 정도의 속도로는) 운전하는데 실제적으로 더 안전함에 가까운 조건이라고 느껴진다. 이것도 역설적이고 변증법적인 부분인데, 아득한 뿌염의 감각을 갖고 운전을 하다보면 나는 불안한 편안함을 느낀다.


한참 불안한 편안함으로 운전을 하고 있으면 이따금 너무나 편안한 상태에 빠져들기도 한다. 내가 자전거를 운전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로 말이다. 그럴 때면 이 정도는 너무 위험하다 싶어서 스스로 어깨를 한번 들썩이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곤 한다.


역설적인 편안함은 어느새 쉽게 깨트려지지 않는 무엇이 되어 있다. 그런 상태가 마음에 안정감을 주어서 시야에서 일어나는 돌발적인 움직임에 대한 포착과 그에 대한 대응이 더 편안하고 안전하게 이뤄진다. 그럴 때면 스스로 느끼는 나의 운전 스타일이 고급스러운 검은색 세단의 드라이빙 같다고 느껴진다. 안경을 쓰고 운전을 할 때는 조금 더 자신감 있어지고 강해지고 경박해지고 앙칼져지고 거칠어진다.


또 그것은 ‘홀가분함’의 감각과 연관이 있다. 나는 꼭 헤드폰을 쓰고 음악을 들으면서 자전거를 탄다. 안경과 헤드폰을 함께 쓰고서 자전거를 오래 타다 보면 안경의 테가 헤드폰에 눌리는 느낌이 시간이 지나며 점점 크게 느껴진다. 그러다 나중에는 관자놀이 쪽이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파온다. 어느새 안경은 무겁고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홀가분함의 감각이 중요한 순례길의 여행자에게처럼.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 있고 짜증스러운 환자가 이불을 다 차내버리고 싶은 마음처럼.


별로 안경을 쓰고 싶지 않은 또 다른 이유도 계속해서, 다 ‘지금’과 관계된 것이다. 지금도 안경을 쓰지 않고 타이핑을 하고 있는데. 묘하게도, 안경을 쓰지 않은 채로 글을 쓸 때 오히려 지금의 삶의 느낌에 더 가까워져 있다고 느낀다. 한글 프로그램의 하얀 화면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고 타자를 치면 피아노의 솔 음처럼 선명해진다. 시야도, 글도 말이다. 그러다 허리가 불편하게 느껴서 다시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문장을 써나가면 시야가 뿌얘지면서 묘하게도 문장도 조금 너저분해 진다. 피아노를 사랑하는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하면서 패달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처럼. 두껍고 탁하고 먹먹한 음색과 얇고 맑고 청명한 음색 어딘가를 넘나들며 연주하는 것처럼. 이러한 느낌들을 아날로그하게 조절하면서, 잘 길들여진 업라이트 피아노 앞에 바싹 붙어 앉아, 그것을 연주하는 느낌으로 글을 쓸 수 있다.


안경을 안 쓰는 생의 느낌이 지금과 가까운 이유를 더 세밀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또 다시 두 가지 이유로 나뉘어 표현할 수 있다. 하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 얼굴일 때의 홀가분함이 안경을 썼을 때의 감각보다 지금의 감각에 더 가깝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기자로부터 잘 때 무엇을 입고 자느냐는 질문을 받은 마릴린 먼로가 샤넬 넘버 파이브-라고 말했다는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Channel No. 5. 그것은 나로 하여금 무언가를 생의 처음으로 상상해보게 하는 대답이었다. 먹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었던 동남아시아의 두리안이나 드래곤 프룻(용과)을 먹어 보고서야 그것이 어떤 과일인지 알 수 있었던 것처럼, 내게 어떤 각성된 감각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감각의 계몽 같은 것을 느꼈다. ‘홀가분함’, ‘자유’같은 단어로는 불충분한, 어떤 미답의 마음의 공간을 더듬어 상상해 볼 수 있게 하는 이야기였다. 이제 막 개발된 최신 기술을 적용한 허블 망원경으로, 누군가의 제안으로 큰 비용을 들여서 한 번도 관측해보지 않았던, 우주의 어두운 한곳을 비춰보자 눈부신 빛깔의 별과 행성들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는 이야기처럼. 아 그럴 수도 있구나.


그리고 이런 생각으로 이어졌다. 나는 왜 그렇게 많은 짐을 지며 살아왔을까.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은 짐을 지고 걷고 타고 앉고 눕고 잠을 잔다. 나는 별일이 없을 때도, 늘 책과 노트북이 든 무거운 가방을 메고 외출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안경을 벗고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아주 무거웠던 한 짐을 벗는 일 같았다.


뿌연 감각이 지금을 더 잘 느끼게 하는 또다른 이유 역시 역설적인 측면이 있다. 시야가 흐려지면 그것이 또렷할 때 의존해 감각하던 비본질적인 삶의 요소로부터 상당 부분 자유로워진다. 화려하고, 새롭고, 다른. 낯섦과 익숙함을 변주하며 혼을 빼놓는 눈의 자극들은 어떤 면에서 생의 껍질 같은 것이다. 그것은 오랫동안 암흑 속에서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이 개안 수술을 받고 처음 봄꽃을 볼 때 느끼는 감동과 전혀 다른 것이다.


늘 봄꽃 속에서만 살던 사람에게는 겨울이 필요하다. 시각에 마음과 혼까지 빼앗겨 버리곤 하는 사람에게 망막을 통해 무분별하게 들어오는 무수한 시각의 정보들은 영혼을 망각하게 한다. 생에도 본질과 비본질이란 것이 있을진대. 그것은 사과의 껍질만 먹고 속 열매는 길거리에 버려버리는 일과 같은 어리석은 삶의 태도에 익숙해지게 만든다. 껍질에 넋을 빼앗겨 생의 과육이나 씨앗으로 향해갈 기회를 다 앗아가 버려, 소중한 시간들을 낭비하게 만든다.


권태. 게으른 포만감. 그것들은 타락으로 미끄러지도록 한다.


또 그것은 정신의 차원과 관계있을 뿐 아니라 실제적 감각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청쾌하게 보이는 시각의 느낌보다 오히려 선명히 보이지 않음이 지금의 생의 감각을 느끼게 한다는 것은 시각장애인의 후각이 더 예민하다거나, 상대적으로 발이 느린 동물의 청각이 더 발달되어 있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 들어 눈의 노화가 급격히 진행되었는지, 잘 보기 위해서 안경을 써도 그렇게 잘 보이지 않는다. 안경을 쓰면 풍경의 초점이 더 잘 안 맞게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불편해서, 자꾸만 자꾸만 벗는다. 눈을 감는 일은 눈을 뜨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대한 궁금증은 여전히 어린이처럼 푸릇푸릇하지만, 눈을 너무 오래 뜨고 있으면 마음이 시끄러워지고, 화가 나고, 스트레스를 받고, 불안해지곤 한다. 눈을 뜨면 공포스럽고 눈을 감으면 아득히 평온해진다. 영원한 안식이란 생에서 이토록 불편한 감각들을 초래하는 모든 것들 벗어버리는 일이라는 점에서 내게 꿈의 절정이 되어간다.

작가의 이전글 연희동의 검푸른 푸르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