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엄마 손 붙들기
이따금 나는 나 자신만을 생각하며 쓴다. 신경질적으로. 크레파스를 부러트리며 스케치북에 자기만의 감정을 풀어놓는 아이처럼 엉망인 글을 쓴다. 그렇게 쓰고 싶은 마음에 사로 잡혀 형식이나 내용이나 완성의 여부마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엉망진창의 글을 쓴다.
그럴 때 내가 쓴 글 같은 글이 나온다. 어떤 아득한 곳을 뒤로 한 커튼을 살짝 열어 본 것처럼, 나 같은 글이 비로소 조금 엿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내 개성의 뾰족함이 보인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과 살결이 뒤섞여도 아무렇지도 않고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것처럼, 나다운 글이다. 나다. 그렇게 나지막이 혼잣말하며 깊은 숨을 마신다.
이때 내가 쓰는 방식은 용암처럼 들끓는 마음속에서 팝콘처럼 튀어 나오는 문장들을 아무런 자기 검열 없이 빠르게 받아 적어 내려가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쓰는 것은 아니다. 이번 글은 그런 방법을 사용해서 써보자- 하고 쓰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글은 그렇게 쓰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는 순간적으로 수많은 연극의 대사들이 떠오르기 때문에, 집중해서 받아 적지 않으면 조금 전에 떠오른(때로는 드물게 아주 내 마음에 들었던) 한 문장의 손도 아득히 놓쳐버릴 수 있다.
이것은 어느날인가 벌린 클링켄보그의 '짭게 잘 쓰는 법'에서 보았던 묘사와 비슷하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배우와 같은 것이다. 한 문장이 아주 횡하고 공허한 분위기를 한 연극 배우의 대사 같다. 한 배우가 사뿐사뿐 가만히 무대에 걸어올라온다. 그리고는 관객을 바라보며 짤막한 자기 대사를 하고 나간다. 그리고 또 다른 배우가 무대에 올라와 하나의 대사를 하고 나간다. 배우들은 고유한 제 각각의 인격들이다. 비슷한 개성의 결을 가진 배우들도 있을 수 있지만, 근원적으로 각 사람의 개성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배우들의 대사 사이에는 개연성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들은 한 편의 연극을 연기하고 있다. 하나의 작품 안에서 어떤 식으로써든, 얼마 만큼의 점성으로써든, 각각의 연기는 연결이 되어 있다. 관객들은 수많은 단역 배우들이 알 수 없는 대사를 내뱉으며 무대를 오르내리고 있는 이 연극이,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라고 믿어야 한다. 그 믿음이 집중력을 불러 일으키고,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기도 한다. 이야기는 작가의 것이지만 해석은 관객의 몫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색조는 무엇일까. 음계는 단조일까 장조일까. 그렇게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가 협연하며 이야기는 어디론가를 향해 날아간다.
그렇게 쓰게 될 때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독자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독자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물론, 아예 어떤 염두에도 두지 않아야 한다.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해야 한다. 내 안에만. 내 안으로만 파고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한번도 비춰지지 않은 내면 안에 있는 깜깜하고 서늘한 지하 예배당으로 오도카니 저벅저벅 들어가야 한다.
이것은 독자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독자를 무시하는 것이다. 독자를 무시함으로써 더 진지하게 경의를 표하며 더 깊이 그들 속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가 캄캄한 바다 위 저편에서 손을 내밀고 있는 예수를 향해 물 위를 걸어가고 있는 현실과도 비슷하다. 절대로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 자기든 자기의 힘이든 어둠이든 빛이든 의심하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걸어나가야 한다.
그래도 좀 독자가 좋아할 만하게 쓰고 어떤 구색은 맞춰야지. 그렇게 만일 독자를 생각하고 글을 쓴다면, 그 순간 글이 경색되어 버린다. 사전을 찾을 필요도 없다. 맞춤법을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우선 미친듯이 써나가야 한다.
만일 한순간이라도 내 글을 읽을 독자를 떠올린다면, 그 순간부터 글은 재미가 없어져 버린다. 쓸수록 바다로 삼켜진다. 믿음을 잃어버린 베드로처럼 무의미한 수면 아래로 잠겨들어간다. 숨막히도록 아름답고 고유한 어떤 숨결은, 외부 세계의 폭력과 사회의 형식에 구애받고, 자기 정직이란 윤리나 사실성의 고증이나 갖가지 검증에 의해 압살 당한다. 뾰족한 플라스틱 입구의 끝을 잘라버린 순간-접착제처럼 서서히 차갑게 굳어간다. 내 안의 열기는 식어버리고, 문장들은 경직되어 버린다. 아름다움은 전형성에 갇힌다.
그러니까 나는 누군가 쓴 유순하고 무난하기만 한 문투의 글을 보거나, 심지어 다른 작가가 잘 쓰는 단어나 문체를 따라한 듯한 글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삶은 수건처럼, 비슷한 느낌으로 표백된 기독인들을 볼 때도 짜증나고 답답하고 별로 친교를 나누고 싶지도 않다. 자기는 없고 자기를 지배하는 것만 남은 사람들. 그들의 비인격성이 징그럽고 끔찍하다. 하나님이 고작 그런 종교인을 만들려고 인간을 창조했을까. 과연, 고작 그런 수준의 하나님일까. 그들은 하나님을 억울하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자기만 오해할 뿐 아니라 타인도 하나님을 오해하도록 매개한다.
살아가면서 형식이란 때로는 내용을 대체하거나 초과하거나 전복시킬 만큼 중요한 것일 때가 있지만, 글에 관한 한 형식이 본질적인 내용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여지는 없다. 글이야말로 형체를 알수없는 아름다움의 덩어리다. 암흑같은 우주이며 실체를 알 수 없는 끝없는 이야기다.
질서를 찾고 형식을 찾고 독자의 구미를 고려하기에는 내 안의 우주가 너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숨막힐 만큼 암담한 이 우주에서 빛나는 별들을 허겁지겁 주머니에 주워 담기에도 급급하다. 독자는 철저히 외면 당해야 한다. 무시당하고 경멸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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