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를 보면 1원~30원 정도씩을 준다. 몇 개의 앱에서 제각각 행하는 ‘이벤트’이다. 어떤 광고는 5초, 어떤 광고는 15초, 어떤 광고는 30초나 심지어 1분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래. 내가 노느니 한다, 라며 하나씩 하나씩 광고 퀘스트들을 지워나가면 어느새 적립금은 천 원, 이천 원, 삼첨 원까지 되고 만다. 나는 그걸로 책을 사는데 보태거나 미니 약과나 쫀득이를 사먹는다.
책을 사는데 보태면 그래도 어딘지 흐뭇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사천 오백 원 하는 미니 약과나 하나에 구백 원 하는 쫀득이를 먹어버리고 나면 어딘지 허탈한 기분이 드는 마음을 속일 수가 없다.
내 시간을 팔아 나는 쫀득이를 먹고 있구나. 미니 약과를 하나씩 까먹고 있구나. 먹는 순간에는 어딘지 보람이 있는 것 같다가도, 방안에 있는 작은 쓰레기통에 다 먹고 난 봉지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보면 허탈하기가 그지 없다.
나와 나의 시간은 매미가 되어 훨훨 날아가 버리고, 정작 나는 얇고 투명하고 징그러운 허물로 남아 흙바닥에 가만히 뉘어 있는 기분. 마치 어떤 영겁의 시간 속에 정지해 있는 기분. 나와 나의 모든 에너지가 0에 수렴하는 기분. 나의 시간이 녹아버린 플라스틱처럼 느껴졌다. 아무런 무게감도 중량감도 없이 한없이 가볍고 의미 없는 것으로. 광고 보기 이벤트는 ‘이벤트’일까. 스마트폰으로 광고를 보는 일은 불로소득일까. 그런 의문들이 존재를 둘러싼 피부의 각질처럼 벗겨졌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김애란의 소설집, <비행운>에 나오는 문장들이다. 이 글귀를 처음 접한 순간은 수년 전 어느날 무심코 라디오를 들을 때였다. 라디오를 돌리다가 뜻밖에 좋아하는 여배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어 채널을 멈추었다.
한 방송사에서 일종의 오디오북처럼 유명 작가의 작품을 배우가 낭독하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던 터였던가 보다. 어딘지 비장한 배경음악 위로 여배우가 비행운의 한 부분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잘 잊히지 않는 그 말이, 정은채의 차가운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오싹한 문장이었다.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열 세살에 시작된 질문은 쉬이 끝나지 않았다. 교실 앞에 나가 친구들과 함께 순서대로 자기 꿈을 발표하던 6학년의 그날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냥 아무것도 되지 않으면 그건 인생의 실패일까. 저는 동네를 깨끗이 치우는 청소부가 되고 싶어요, 라고 말하면 친구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마는 걸까.
게으르고 천진난만하게 책을 보고 글을 쓰고, 질겅질겅 쫀득이를 씹어먹고, 인스타에 글 조각이나 올리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면 거대한 소명과 운명의 흐름을 저버리는 것일까. 그런 중에도 내면의 꿈을 잃어버리지 않으면, 반대편에서 치열하게 달려나가고 있을 친구들의 삶보다 어떤 면에서는 잘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언젠가부터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는 획일적이었다. 나의 풍요로운 내면에 대한 흥미. 위트. 독특함. 형이랑, 너랑, 오빠랑 있으면 마음이 편해요. 그런 이들마저도 대화의 말미에는 꼭 이렇게 묻거나 그렇게 묻고 싶은 마음을 삼키곤 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거야? 결혼은?’
그것은 하나의 철옹성 같은 세계관이었다. 그들의 눈으로 바라본 것들이 그대로 자신의 말과 질문으로 터져나오는 것이었다. 물론 진심어린 애정과 더불어서. 삶에 대한 관심이 과정뿐 아니라 결과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사실은 후자에 더욱 빨갛게 핏빛으로 물든 채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묻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를 좋아해서였다. 나는 그것이 감정적인 것이었든 의지적인 것이었든 그러한 사실을 잘 알았고, 또 왜 그렇게 묻는지조차 되물을 수 없을 만큼 그것은 우리에게 당연한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나의 내용과 과정에 대한 호기심도 정말 진정하게 있지만, 그것은 어떤 늘 어떤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의 결과가 궁금한 그들에게 그것은 지나쳐 가는 것이지 목적이 아니었다. 첫 페이지를 읽고 바로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싶은 마음을 참아가며 중간 페이지를 삐르게 읽어내려가던 사람들에게, 나는 고마움을 느끼기까지 해야 했다.
과정을 결과보다 지나치게 사랑하면서 쓸데 없는 일에 몰두하는 나와는 엇박자를 그려 나가게 마련이었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나를 궁금해 했다.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또는 왜 그렇게 굼뜬지. 왜 그렇게 말하는지. 성실하게 답해 주기도, 무성의하게 침묵하기도 했다. 사람 따라, 상황 따라 어떻게 해야 할지를 구별하고 판단하는 일은 쉬운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종종 그런 사람들에게 그저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며 소비되고 착취당하는 역할을 맡곤 했다. 화를 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들이 맞았으니까. 의문도 채근도 용서도 다 당연한 것이었다.
비옥한 내면은 그래서 결과는 무엇이냐, 무엇이 될 것이냐는 피할 수 없는 물음들 앞에서 언제라도 가차없이 내동댕이쳐질 무엇이었다. 그러면서 비본질적인 많은 것들이 시간과 존재의 채에 걸러졌다. 서로가, 그러니까 친구는 자기 자신의, 또 상대인 나의 비옥함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는 것이 거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친구의 조건이 되어가고 있었다. 걸러야 할 것을 거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언제나 낙천적이고 에너지가 왕성해 비본질과 부산물들을 꿰뚫어볼 눈이 없었던 나는 정말이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감사한 일이었다.
산다는 것, 한 인간이 거대한 성벽같은 현실을 뛰어넘어 살아있는 사람처럼 산다는 것. 과연 그것은 무엇일지. 이즈음 첨예한 관심을 갖고 자신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놀라울 만큼 세계와 선명한 마찰이라고는 거의 없이, 작고 작은 마찰들만을 일으키고 있는 자신을 지켜보면서.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덜 중요한지, 끝도 없고 답도 없는 물음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