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집으로 이사를 가고 나서 얼마 지나, 설레는 마음에 자취집 근처에 있는 꽃가게에서 한 번에 화분 세 개를 샀었다. 독립을 하고 얼마가 지나 화분 하나를 더 선물 받아서, 그렇게 총 네 개의 화분을 갖게 되었다. 한동안 그들은 잘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사올 무렵에 생존한 화분은 두 개였다. 살아있는 두 개의 화분들 중 하나는 최근에 이사를 오고 나서 그만 바싹 말라 만지면 바사삭 부서질 정도의 노란 잎과 줄기로 남게 되었다. 작은 유리병에 담겨 있던 수경식물이었는데, 이사오고 나서도 아직 나의 어린 영혼은 도착하지 못하던 중 집 안의 야외 어딘가에 두었던 화분을 잊고 있던 새 물이 다 말라버리고 만 것이다.
또 다른 화분 하나는 원래부터 관리를 잘 안 해도 잘 살아 남는 식물이었다. 나는 그 화분을 우선 옥탑방 앞의 마당에 내놓았다.
얼마가 더 지나고 그것은 큰 화분에 옮겨 담아지게 된다. 그리고는 쌀쌀한 날씨 속에서 며칠간 차가운 봄비가 뿌려졌다. 세차게 바람이 불었고, 비로 인해 기온이 많이 내려갔다. 그렇게 쌀쌀한 봄비의 날씨 속에서 거센 바람과 찬 비를 견디지 못한 한 줄기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옮겨 심은 화분의 흙이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쓰지 않아 흙의 질감은 푸설푸설했으며, 밀도도 높지 않고 가벼운 흙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 심길 때도 조금 얕게 심겨져서 아직 뿌리가 그리 깊이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술취한 아저씨처럼 뉘어지듯 기울어진 줄기를 살짝 들어올려 조금 더 깊이 심겨 주고, 또 주변의 흙을 다져 다시 어느 정도 곧게 서있도록 해두기도 했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났다.
그리고 바로 어제. 아기처럼, 작은 꽃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두 송이 정도의 꽃이었다. 자취집에서는 그렇게 피어라- 피어라-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며 바라고, 생각날 때마다 물을 주고, 발코니와 집안을 번갈아 옮겨 가며 햇빛과 바람을 쐬게 해도 피지 않던 꽃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줄기와 풀잎만 자라며 몸집만 키우던 식물이. 수줍은 연분홍색을 띠며 거짓말처럼 피어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내가 살던 고향집의 옥탑방에 올려 놓은지 2주 정도나 지났을까. 연한 분홍색의 작은 꽃잎을 바라보면서 복잡미묘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신비로운 감정이었다.
아울러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을 두고 나는 두 가지 상반된 해석을 하게 되었다. 야생과 - 집, 자유와 - 안정으로 대비되는 변증법적dialectical 해석이 그것이었다.
나의 생애 첫 자취집이자 마지막 자취집이었던 곳은 인정머리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노친네가 주인인 곳이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턴가 월세나 세금을 밀리며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는데... 그만 두자.. 말해서 무엇하랴. 아무튼 그 집이란 식물도 그 퍽퍽함을 견디기 힘들 만큼 황량한 토양의 집이었다고 해두자. 벽지 안과 바닥의 곰팡이도, 더 말해 무엇하랴.
너무 예뻐서 샀던 백리향이라는 꽃 화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 시들어 죽고 말았고, 교회의 한 자매가 생일 선물로 주었던 화분도 한두 달 정도를 버티다가 그만.
그 자매는 서운한 감정을 못내 감추지 못했다. '와- 정말 오래 갈 수밖에 없는 화분인데.. (얼마나 관리를 안 했으면..)- 라며.' 실은 그 화분을 잘 키우기 위해 나름대로 물도 잘 주고 관리를 했던 터였지만. 나는 더 이상의 말대꾸를 굳이 하지 않았다.
그 집은 주인이나 세입자나 정서적으로 원래 가난했거나(주인), 급속도로 가난해진 사람(세입자)들의 공간이었다. 따라서 그 영혼의 가난함들에, 화분으로서도 숨이 막혔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첫번째 해석이다. 사막에서 무슨 꽃이 피랴. 사랑의 불모지에서 어떤 사랑이 꽃 피울 수 있겠는가. 화분이 정말 생명이라면, 가난하고 강퍅한 인간의 에너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집은 그러니까 안정이 없었다. 안정이 없는 곳은 집이 아니었다. 사람이 집이 아니라고 느끼는 곳에서는 화분도 불안해 하면서 자기 집이 아니라고 느끼나보다 보다-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 집은 구옥 빌라였다. 위로 올라가면 꽤 넓은 옥상이 있었지만, 나는 이띠금 발코니나 화장실 창문가나 안방 창문가에 두는 정도로 화분에게 자유를 주었다. 그 정도로는 화분이 흡족한 자유를 느끼지 못했나 보다. 화분이 바람을 쏘일 수 있는 시간은 하루, 이틀, 사흘 정도였고, 그 또는 그녀들은 주인에 의해 금세 또 다시 황막한 집 안에서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화분에게 있어서 자유란 바람과 볕과 그늘, 새소리나 벌레, 노을, 차가운 습기와 어둠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들이 숨쉬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들을 집안에 두었다. 그들은 자유와 야생을 느끼지 못했다. 식물이라고 왜 자유가 중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자유가 없이 어떤 생명이 꽃 피울 수 있을까. 그런 깨달음은 옥상 마당에 내놓은 화분이 마침내 꽃을 피우고나서야 찾아 왔다. 두번째 해석이다.
이 집은 사라질 수 없는 사랑이 근저에 살아있는 집이다. 그것에 대한 사연은 생략하겠지만. 정말이지 이 집은 들어오는 순간, 극성스러운 사랑의 기운을 온 영혼으로 체감해야 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집이다.
안정은 사랑에서 온다. 이 집에는 사랑이 있고, 그것에 기반한 어떤 안정이 있다. 항존적으로 그 사랑의 영혼이 감싸고 있다. 화분은 아마 그 사랑을 느꼈을 것이다. 내가 집에 돌아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또 다시 첫번째 해석에 해당하는 해제다. 화분에 꽃이 피게 된 사유에 대해. 가장 선명한 이유일 것이다.
안정과, 집. 안정적인 집. 그것과 상반되는 두 번째 이유는 이 집 옥탕방 앞 마당의 자연적인 환경에 대한 것이다. 옥상 마당은 작고 아담한데, 오전이나 한낮의 볕이 정말 필리핀과 인도 수준으로 잘 든다. 또 옥상 벽이 낮아 바람은 얼마나 세차게 화분들을 쓸고 지나가는지. 볕과 바람과 그늘과 해질녁의 황혼 빛, 작은 벌레나 이따금 집에 드리우는 그늘이나, 어둠. 모든 것이 화분에게는 살아있는 것들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