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콜요청만 금지가 아니라 유튜브도 금지다. 라고 말하고 하루에 두 시간은 족히 본다. 시사 평론은 그래도 좀 봐야 사회가 돌아가는 것을 알 수 있다느니. 클래식 상식은 교양을 쌓는 일이며 쉼에도 도움이 된다느니. 합리적인 이유는 늘 있었다. 인문학이나 커피, 음악, 요리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방대한 관심이 많은 그.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숏폼이라고 불리는 짧은 영상은 거의 안 본다는 것.
오늘은 자고 일어나자마자 영롱하고 맑은 아침에 머리맡의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집어 들었다. 특히 한 작가의 소설을 그렇게 읽어보고 싶었다. 그는 젠더 이야기를 쓰는 소설가로 알고 있는데.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무엇이든 남김없이 핥아 보고 싶었다. 구강기 아이처럼 무엇이든 집어서 다 혀에 대보고 싶었다. (그것은 삶을 대하는 위험하고도 현명한 태도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생에서 만나는 사물이나 사건에 직접 혀를 대보지 않고 무엇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라고 그는 생각했다.)
더욱이 그 작가는 실제 경험담을 소설로 출간해 문제를 일으켰던 사람이었다. 작 속 등장인물의 배경이 되는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생략한 채로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검은 호기심을 더 자극했다. 나는 쥐 잡듯이 문제작이 포함된 책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이미 다 판매 중지 조치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중고 시장을 뒤져보았고 관련한 scene에서 한동안 사악한 작태가 벌어지고 있던 것을 목격했던 것도 기억한다. 나처럼 어두운 내면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가 될 법했는지 판매 금지가 걸리자 중고 서점이나 개인 셀러들이 해당 단편이 포함된 중고책들을 새 책 정가를 훨씬 웃도는 가격에 팔곤 했다.
나는 윤리적 문제작을 읽고 싶어 하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파는 행위는-그것도 심각한 바가지를 씌워서- 어떤 연유에서인지 비열한 인간사의 한 모양 같았다. 심지어 어떤 중고 서점은 십만 원에 내놓기도 했으니까.
그 작가의 판매 중지 작을 찾아본 것은 아마 사오 년 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무언가에 미쳐 집착하고 탐닉하던 나의 마지막 모습도 그로부터 한두 해 이후까지였을까. 잊고 있었을 뿐, 그런 어두운 호기심을 늘 마음 한편에 품고 있다가 마음의 안정감이 어느 정도 충전이 된 오늘 오전에 이르러서야 그의 이름으로 발표된 작품을 펼쳐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책장을 펼쳐 들고 읽어나가는 아침. 세 가지의 이유에서 마음이 살랑였다. 첫째로 눈을 뜨고 한심하게 유튜브를 켜지 않았다는 것. 드디어 나의 세계에서 오랫동안 문제의 작가였던 사람의 작품을(윤리적 문제작이 아닌 다른 작품이었을지라도) 그것도 일어나자마자 읽어나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책을 집어든 것이 아득히 오랜만이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고요한 아침에 책부터 집어든 것이 기억하는 한 거의 7년 전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한나의 아이‘였으니까(그것도 교회 지인들과의 엠티 숙소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난 아침에 책부터 집어들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늘 그러고 싶어 했던 나였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것은, 한편 그럴 수 없는 나였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사소한 일상의 비틀어짐이 설레는 복선 같았다. 내 마음이나 몸이 그만큼, 어떤 평형을 잘 찾아가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뜻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계곡에 가재가 보이면 환경이 좋아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 것처럼 말이다.
책을 펼치면서 이런 이상, 또는 정상 징후를 느끼는 나의 마음속에서 잔잔하게 설렘이 일었다. 커피가, 운동이, 쇼팽이, 모차르트가. 슐라이어마허를 읽어볼 마음마저 생각났다. 이 중에서 가장 고무적인 것은 슐라이어마허였다. 종교론이 문득 미치도록 궁금해 마지막으로 펼쳐본 것이 거의 십 년 전이니까.
슐라이어마허는 가재 같은 것이었다. 내 정신이 가장 맑고 고양되었을 때만 읽어볼 엄두가 나는. 정신의 수질의 지표 같은 것이었다. 아무튼 나는 이제 이렇게 계속해서 나의 문제의 작가의 책을 펼쳐든다. 어둡거나 밝은, 맑거나 탁한 호기심을 가지고. 내가 되어서. 어쩌면 눈물샘을 꾹 누르고 읽어나가야 할 정도의 내가 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