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고요한 밤 1

블랙 유머

by jungsin




단정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단정해야겠다.
마음도. 시선도. 다른 어떤 무엇도 좀 단정해야 되겠다.





내 이름은 스페너. 줄리아와 숱하게 만나 놀던 동네에 왔다. 9년이란 세월이 지났는데.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이디야도, 용달차 꽃가게도. 그 스타벅스도. 스타벅스의 이층 바깥에 있던 그 화장실도, 화장실 가는 길 모퉁이에 있던 미용실도, 롯데리아도 그대로였다.


이디야를 보자 그 애가 토피넛 라떼를 좋아한 것이 새삼 생각났다. 두손으로 토피넛 라떼를 움켜쥐고 정말 맛있게 먹었는데. 롯데리아를 보고는 라즈베리 아이스크림 때문에 투닥거렸던 날이 생각났다. 자신이 전혀 안 좋아하는 것을 사왔다며, 아직 좋아하는 것도 모르냐며 반응조차 없던 그녀의 모습에 어이도 없고 서운해서 데이트가 위태로워졌던 기억. 나는

나대로 마음이 옹색해져 따듯하게 말하며 감싸주지 못해, 그런 내 모습에 그녀가 한 번 더 토라지며 경색되던 분위기 같은 것이 생각났다.


돌아보니 모든것이 다 귀엽고 아름답기만 했던 날들. 성탄절에 교회 사람들과 새벽송을 함께 하며 보내자고 해서, 단단히 삐진 그녀를 달래기 위해 이곳 용달차 꽃가게에서 엉성한 몇 송이 꽃다발이라도 사주려 했던 것도 생각났다. 스쿠루지가 자기의 과거를 보는 것처럼 나의 눈앞에서 생생히 재현되었다.


그녀와 수도 없이 걸으며 왕복했던, 그녀의 회사 근처 거리를 무심히 걸어보았다. 어떤 아저씨가 나를 붙들려 한다. 돈 빌려달라고 하려는 걸까- 선입견을 갖고 바라보는데, 친절하고도 또렷한 눈빛으로 뭐라고 말한다. 점점 거리가 가까워져 보다 선명히 들리는 말은 베트남 아가씨, 필리핀 아가씨 있는데... 한번 놀러 오세요. 한국 아가씨도 있어요.


아,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얼버무리며 걸음의 속도를 늦추지 않고 피했다. 내 거절의 말이 뒤늦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뭐가 죄송하단 건지. 그녀와 처음으로 가볍지 않은 표현을 하던 그곳 앞에서 하필. 참 세상이 역설적이고도 부조리하다는 생각과 함께, 나는 부도덕하게도 위티witty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부조리하게도 그런 악독한 장면이, 조금 우습게마저 느껴졌다.


베트남 아가씨 있어요-란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친절하게 하는 장면을 보고 마음속 어딘가에서 어렴풋이 희미하게 웃음기가 머금어진 이 부조리함에, 또 어이 없어 실소가 터져 나올 듯 했다. 실소의 무한궤도 같았다. 실소가 계속되면 울음이 될까. 부조리함은 세상 뿐 아니라, 나의 안에도 늘상 있는 것이어서 우습게 느껴졌을까. 실소만 터트리다가는 삐에로의 눈물처럼 괴상한 울음을 터트리게 될지도 몰랐다. 나는 생에 대해, 삶에 대해,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입장을 분명히 해야 했다. 어떤 선명한 의지를 필요로 했다.


잠깐 그곳을 들어가보려다 말았다. 다시 돌아서 나오는데, 이번에는 어느 아저씨 세 사람 정도가 그 호객꾼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정하게 대화를 섞고 있었다. '베트남 아가씨 있어요? 아 그래요. 놀다가 이따 한번 돌아와 볼까? 너무 해맑고 명랑하게 말을 주고 받고, 그들끼리 상의도 하고 있는 듯 느껴졌다. 서둘러 그들과, 그들의 희희낙낙함을 앞질러서 걸어갔다. 이렇게 엄중한 순간에 이토록 엄중한 곳에서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풍경이 펼쳐지다니. 심각한 블랙 유머였다.


이토록 악독한 일을 저지르며 살아가도 살아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악이 일상적인 것이 되고 내면화되어 마침내 전혀 무감해질 정도로, 살아있다는 것은 위풍당당한 것이었다. 인간에게 주어진 생은 인간에게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생은 대단한 호통이었다. 또는 반대로 아가씨를 운운하는 저 아저씨들처럼 볼품없이 살아갈 것이라면 그것은 죽은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이 하찮은 것이었다.


살아있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

어두운 주말 밤이면 귓속말을 하듯 또는 떵떵거리면서, 아가씨란 단어를 입어 올리고, 흥청거리고, 비틀거리는 아저씨들. 이런 악과 모순과 부조리가 뒤엉켜도, 어쨌든 살아있는 사람들. 정말 살아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우리 모두가 그것의 실제를 알게 되면 소름끼칠 만큼, 대단한 신의 호혜를 받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더욱이 젊음은. 청춘은.




keyword
작가의 이전글On a Satu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