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다는 리듬
돌아오는 길. 지하철이 어느 구간에 오면 열차 내 실내등이 어두워지는 것도 그대로였다. 세상은, 너무나 놀랍게 그대로였다.
마침 음악 앱의 무료 이용기간이 끝나 헤드폰도 벗고 있어 모든 것을 생생하게 감각했다. 이렇게 선명하게 무언가를, 살아있다는 것을 감각하는 것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랜만이었다. 이 자체의 감각만으로도 좋았다.
이 링 모양하고요, 시나몬 도너츠 할게요. 아, 이 긴 것도 담아 주세요. 왠지 들떠서, 주저함없이 던킨도너츠에 들어가기까지 했다. 나에게 던킨 도너츠란 풍요로웠던 시절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었다. 커피는 필수적인 것이었지만, 도너츠는 아니었다. 꼭 먹지 않아도 되는, 잉여롭고 여유로운 것. 하얀 설탕잼이 발린 도너츠. 커피 앤 도넛, 주황색 던킨도너츠.
아주 오랫동안 그런 곳에는 발도 붙이지 않았다. 돈이 아주 많이 있어도 가지 않았고, 돈이 너무나 없어도 떠올리지도 않았다. 나의 내면은 어떤 지독한 황폐함 속에 빠져 있었다. 그러니 우연을 핑계삼아 불쑥 이렇게 오래된 전 연인의 회사 근처에 발걸음을 옮기는 나를, 나는 스스로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힘없는 노인처럼 천천히, 신중하게 걸었다. 태연하게. 그러나 무척이나 떨리는 마음으로 걷고, 이동하고, 화장실을 가고, 카페를 가며 가만히 촉수를 뻗었다.
섣부르게 그 의미들에 대해서 생각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것들을 가만하게 느끼는 데 집중했다. 이 모든 것들의 모습과, 차가운 공기들과, 냄새와, 연소되어 버린 사건들과, 시간들. 이러한 모든 것을 아기 예수가 태어나던 성탄의 밤처럼 고요히 응시했다. 아주 생경한 두려움과 떨림을 가슴에 품고 다만 가만히 지켜보았다.
의외로 나의 온도는 차가웠다. 잠결 중의 꿈 같기도 했고, 어떤 미래를 바라보는 희망찬 꿈 같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나의 내면은, 더 이상은 그럴 수 없을 만큼 숨막히게 냉정하고 차가웠다.
그런데 그 상태가 가장 선명하고 행복하게 다가왔다. 술이나 마약을 아무리 아무리 탐닉한다 해도 이런 순간들의 정신의 상태보다 더 충만히 엔돌핀이 감도는 상태가 될 수 있을까. 외부의 자극을 통해서 이런 살아있는 감각을 얻고자 했다면 실패했을 것이다.
그동안 심리적이거나 종교적인 차원의 실험과, 방황과, 쉼을 명분으로 스무살의 취기에 의지해 보기도 했지만 가당치도 않은 시도였다. 내 밖의 것들로는 이런 순간들처럼 선명한 존재적 각성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런 일들은 오로지 나만, 내안의 것들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오직 내 속에서만 작동하는 생명이란 것이 있었다.
감각과 사유. 기억과 꿈. 비관과 낙관. 절망과 희망. 자웅동체와도 같은 암수의 사유와 감각들이 오직 내 안에 다 있었다. 스스로 잉태하고 산파할 수 있는 고유하고 독특한 생명과 활기가 나라는 항아리 안에서 청국장처럼, 미생물 유기체처럼 고스란히 숨쉬고 있었다. 나는 나를 돌아봐야 했다. 나와, 나의 시간을 돌보고 보듬어 주어야 했다.
이렇게 살아있음을 감각한 것이, 무언가 이렇게 정상적인 리듬을, 이렇게 생동하는 리듬을 느끼고, 새삼 실감하며 살아있어 본 것이 얼마만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