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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세상이 있을지

<산다는 농담과 쓴다는 고민>

by jungsin


#문학주간

#9월19일

#문학주간2025_리뷰



우리, 쓰는 사람들은 정말 힘든 순간들을 관통할 때 내가 이 모든 경험을 꼭 이야기로 쓰리라 다짐하는 거 아시죠.
살다보면 정말 표현도 설명도 이해도 불가능할 만큼 끔찍한 순간들이 있잖아요. 그처럼 끔찍한 삶의 순간에,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고, 눈을 질끈 감으면 나중에 이야기로 쓸 수 없어요.
생생히 살아서 다 느끼고, 콧구멍을 큼큼거리며 다 냄새 맡고, 눈을 크게 뜨고 다 보아야 돼요. 그래야 이야기를 쓸 수 있어요.

- 양다솔 작가



너무 인상적인 말이었고, 웃으며 치유되며 들었다. 그러는 동안 위의 큰 따옴표 속 그녀의 말이 계속 가슴에 남아서 맴돌았다. 그녀가 말한 그대로는 아니고, 내가 마음에 남은 것을 좀 각색하고 많이 덧붙여서 다시 쓴 것이다. 비록 개인적 다사다난함으로 늦게 도착해 전체 대담의 반도 못 들은 것 같지만. 너무 인상적이고 즐거운 프로그램이었다.


금개 작가는 ’저는 창작자가 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있었어요.‘라는 말을 내 가슴속에 남겼다. 창작자가 되고 싶었다는 그녀의 열망이 왜 그런지 내 가슴에 닿아,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창작자.. 창작자. 창작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얼마나 자유롭고 뭉클한 마음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도 처음부터 창작 활동에 완전히 뛰어들지는 않았다고, 그냥 멋있어 보이는 사람들 주변을 ‘얼쩡거렸다’고 했다. 그런 마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글쓰기에 바로 천착하지 않고, 무언가의 본질이 아닌 주변을 얼쩡거렸다는 그녀의 이야기도 내게 다가와 웃기고 찡한 것이 되었다. 왜 그렇게 느껴졌는지 되짚어보면, 어딘지 나에게 있는 모습 같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얼쩡거림은 무언가에 본격적으로 빠지기 전에 아주 한참 동안 내가 취하는 태도이기도 했던 것 같아서 말이다.

또 그녀는 혼자 일하는 것을 안 좋아한다고, 항상 ‘사람’과 일하고 싶다고 했다. 저 사람과 내가 함께 일해서 만들어낼 이야기와 분위기 같은 것의 일체가 너무 궁금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효율적인 방법이기 때문은 아니라고. 그냥 그게 좋아서라고 말한다. 관계적으로 손절도 당하고 문제도 생기지만. 관계를 복판에 두고 일한다는 것이 원래 그런 것 아니겠느냐고, 관계의 속성은 비효율성이라고 말한다. 마디마디마다 할머니의 관절이 쑤시듯 공감되는 말만 하는 그녀였다. 아니 도대체 사람들이 이렇게 유쾌하구나 생각했다.


산다는 농담과 쓴다는 고민



내가 듣고 본 모든 그것들 중에 평생 가장 재밌는 대화 중 하나이지 않았을까. 이쯤에서 여자들의 수다란 피곤한 것-이란 부정적 인식을,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갖고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물안 마초맨의 어리석은 편견은 오늘 바사삭 부서졌다. 여자들의 대화가 이렇게 재밌을 수 있다니. 유년기에 발이 많은 벌레를 처음 볼 때처럼 충격적이었다. 너무 다들 매력적이다보니 달뜨고 말았다. 결혼을 행복과 연결시키는 일에 대해 냉소적이었던 내가, 잘못하면 행복할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하고 말았다.

*심지어 나는 솔로에 세 작가가 출연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하는 진지한 고민마저 해보았으니 말이다. 나는 일단 금개 작가님이라고 생각했다. 일은 양다솔 작가님과 하면 좋을 것 같았다. 시골 생활과 이른 결혼으로 어른스러움이 몸에 밴 동시에 특유의 위트감을 가진 듯한 노해원 작가님은 이모나 고모, 담임 선생님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노해원 작가님은 일단 기혼이니까. 금개 작가님과 양다솔 작가님 사이에서 잠시 치열하게 고민했지만. 양다솔 작가님은 싸울 때조차 너무 맞는 말을 센스있게 잘할 것 같아서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언어와 관련된 어떤 일이나 작가적 깊이를 필요로 하는 일로서 만나 한편이 된다면 미군이 주둔하는 안보 국가의 기분이 될 것 같았다. 언어의 세계란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롭고 넓은가. 나는 또 얼마나 좁은 세계에 스스로 한계지어지며 머물렀는가. 작가들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들인가.


넓은 세계가 있을까. 희망이 있을까. 내가 알지 못하는 목마름이 있을까. 두리번거려 보고 싶었던 나의 의도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 같다. 양다솔이 말한 ‘글감’으로도 쓸 수 없을 것 같은 끔찍한 시간의 한복판에서 탈출구를 찾듯, 생존적 본능에 임박한 마음으로 찾아간 곳에서 이렇게 웃으며 치유될 수 있다니. 슬픈 눈으로 웃으며 뭉클해 하고 간지러워 했던 기분을 아직 내 언어의 세계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




*물의를 일으킬 상상, 죄송.

#금개 #노해원 #양다솔 #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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