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장롱
동네 도서관.
늘 느끼는 것이지만 묘한 공간이다. 차분함과 설렘, 무거움과 경쾌함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곳. 현실을 능히 초월하고 확장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꿈과 힘을 느끼고, 동시에 인생이 멈춘 듯한 감각을 느끼게 해주는 곳. 십 년 만에 와도, 이십 년 만에 와도 그대로인 곳. 설레고 뭉클하게 하는 곳.
누수 공사 좌석에 냅다 봇짐을 풀었다. 기막힌 틈새 공략이었다. 누수라고는 하지만 물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이용금지 좌석이라 번거로운 키오스크 예약을 안 해도 되었고. 근처 몇 개 자리가 다 사용 금지석인 탓에 반경 3m 이내에 사람이 없는 호젓함도 느낄 수 있었다.
창가 자리라 4층 창밖의 정취도 느낄 수 있었다. 직원에게 걸릴 수 있다는 스릴까지. 야간자율학습의 기분을 느끼기에 최적화된 이 금지 좌석이야말로 본능적으로 내 자리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스타벅스는 질렸고, 고등학생들이나 고시생들 사이에 앉아 열띤 분위기와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고 싶었다. 책도 뜨겁게 읽어보고 싶었고, 때마침 집에 있으면 불편한 어둠의 사연도 있었다.
불안하면서 설레는 고등학교 저녁 도서관을 느끼려면 너무 안정적이어도 안 되고, 너무 불안해도 안 되는데. 이 자리는 그 정도 경계의 긴장과 아늑함을 느끼기에 최적화되었다.
나는 더 이상 야자 감독관의 감시를 받는 고등학생이 아니었다. 걸리면 아, 그런가요- 하며 머쓱해하는 연기와 함께 담담하게 자리를 옮기면 그만일 만큼 충분한 어른이었다. 그것도 아주 점잖아 보이고, 모든 질서를 잘 지키게 생긴.
그러니까 금지된 것을 소망하며 느낄 수 있는 십대의 불안감이, 나는 정말 그리웠다. 안전한 불안감, 또는 제약된 안정감이 그리웠다. 더 이상 거의 아무것도 금지된 것이 없는 어른에게는 어떤 금지 자체가 청춘의 감각으로 다가오기도 하니까. 이런 공간이 주는 안정된 불안감이 설레고, 사무치게 그리웠다.
공간은 시간이 그러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살아있다고 느끼게 한다. 시간은 한 번도 같은 표정을 짓지 않아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면 공간은, 명사처럼 늘 그 자리에 있어 살아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지금 사 학년 구 반 교실에 들어가서 떨리는 마음으로 창가쪽 너댓 번째 줄에 있던 내 자리를 찾아갔는데, 똥파리(단짝 친구)가 짙은 갈색의 울퉁불퉁한 고목나무 책상에 도루코 칼로 깊게 새긴 kjh hjh 낙서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볼 때 교차할 만감의 감상 같은 것 말이다.
시간은 가을이고 나는 도서관에 있다. 모든 게 감당하기 벅찰만큼 엉망진창일지라도 아무튼 난, 살아있는 것이다. 이 좋은 가을에 애착 도서관에서. 흑당 러스크와 아이스 케냐와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 소설과 함께 말이다. 자기 감정을 꾸미는 일은 정말 싫지만 이 정도면 감사해도 되지 않을지. 도무지 감사를 모르는 자신을 살살 설득해 본다. 어른이 되어서도 옷장에 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