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삼월

by jungsin

아주 조금씩 정리 시작…


나를 둘러싼 시간이 무겁고 막막한 날에는 하드털이로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사진들에 정신이 팔린 사이 오븐에 넣어둔 식빵은 익스트림 블랙 로스팅 엔딩이. 아껴 놓고 아껴 두다 결국 다 태워버린 통밀 식빵 한 조각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언젠가는 내 몸도 저렇게 되겠지. 고대에 태어났다면, 생의 끝자락에 길가 어딘가에서 기력을 잃고 쓰러져 부패해 가다가, 땅바닥으로 날개짓하며 내려 앉은 까마귀들의 단단한 부리에 몸이 들썩거리며 살점이 뜯겨져 나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


영화 127시간을 검색하면 아래와 같은 시놉시스를 볼 수 있다.


‘홀로 등반에 나선 아론은 떨어진 암벽에 팔이 짓눌려 고립된다. (…) 그는 127시간 동안 치열한 사투를 벌이며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게 되고 이 과정에서 그는 친구, 연인, 가족 그리고 그가 사고 전에 만난 사람들을 떠올린다. (…) 남은 건 오직… 로프, 칼 그리고 500ml 물 한 병 뿐… (…) 그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마침내 살아남기 위한 결심을 굳히고, 탈출을 위해서는 자신의 팔을 잘라야 하는데……‘



수 년에서 이십여 년이 지난 사진들을 보면서 자기를 본다. 자기, myself.


내 눈이나 입꼬리나 표정, 긴장감이나 기대감에 상기된 나의 낯빛 같은 것을 가만히 바라본다.

지극히 일부의 하드만 털었을 뿐이지만 그 속에도 세밀한 이야기와 많은 귀한 인연들이 있다. 수많은 시절 인연의 사진 속 중심에는 내가 있다.

그리고 나는 안다. 어떤 날들의 내가 가장 자유로웠는지. 가만히 그런 시간에, 내 영혼이 어떠했는지를 더듬어 본다.

세상을 향해 활짝 열린 날들도 있었고, 조금 닫힌 날들도 있었다. 육중한 철문을 닫고 걸어 잠그고 있던 날들도, 철커덩 쥐덫에 갇힌 것처럼 갇혀 버린 날들도 있었다. 지하철 자리에 앉으면 하루가 멀다 하고 상모돌리기를 하며 졸만큼 허덕이며 뛰어다니던 날들도, 사막처럼 할 일이 없어서 새카만 방에서 몇 날 며칠을 나오지 못한 날들도 있었다.



아론은 좁은 협곡에 오른팔이 끼었지만 나는 자신의 영혼이 어딘가에 꽉 끼인 것만 같다고 느낀다. 사진을 보며 내 몸 하나가 희망이었던 나의 날들을 본다. 정말 가진 것 하나 없어도 충만했던 시간들을, 그날들의 자신을 지긋이 바라본다.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밑천인데, 째째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가진 것은 몸뿐이었고, 나의 가장 중요한 희망은 내 존재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도 낙낙하기만 했던 날들.

그토록 푸르른 나는 여전히 사진 속에 그대로 있다. 그런 현실이 새삼스럽다. 그런 새삼스러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희망이 된다. 그러한 일체가 살아있는 존재에게 주어지는 신비로운 감각들이다.



또 나는 내가 믿는 전능자를 생각한다. 줄긋기 문제 풀이를 하듯 나의 시간을 그와 끊임없이 연결지어 본다. 손에서 놓쳐 햇살 아래 환한 내리막길로 굴러떨어지며 자유롭게 풀어지는 실타래처럼, 자유하게 찬양해 보는 하나님도 좋았다. 내가 어디로 풀어져도 그곳에 하나님이 있는 것만 같았다.

엉킨 날들에는 어디로 선을 그어 봐도 볼펜 심의 끝에 하나님이 없는 것만 같다. 동서남북으로 돌아 봐도 하나님이나, 그가 비춰 주시는 길이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큰 길 건너편 동네에서 집을 잃어버린 길 까막눈 아이처럼 두려워 하기도 했다. 추운 겨울을 지나는 동안 몇 날에 한 번, 심지어 몇 달, 몇 해에 한 번씩 힘겹게 점선를 그어 찾아가 보는 하나님은 너무나 귀했다. 남몰래 나지막히 쉬는 한숨과 절망의 날들의 하나님 해석은 오롯이 내것이 되어갔다. 나는 나만의 노트에 빼곡히 글을 써보고, 그제서야 내게 있어 절대자는 마침내 더 넓고, 더 높고, 더 온전하게 당신 자신이 되어가기 시작한다.


이즈음은 숨을 돌릴 수 있게 되면, 잠깐씩이나마 집에 대해서, 영혼에 대해서, 넓고 넓은 하나님이 내 인생에 끼칠 영향 같은 것에 대해서 생각하곤 한다. 학창시절에는 새학기의 출발선 앞에 발끝을 대고 서서 설레고 긴장되는 날이기만 했던 삼일절, 모두 그렇듯 처음 느끼는 감정으로 맞는, 또 소년의 삼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