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 복싱특집에 나왔던 '츠바사'를 기억하세요?
#1
행복에 대한 ‘나만의’ 정의, 성공에 대한 ‘나만의’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사람. 나아가서 내가 하는 일 역시 ‘나의 언어’로 천천히 하지만 또박또박 정의 내릴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위해 오늘도 작은 발자국을 내딛는 사람. 나는 늘 그런 사람을 동경해왔다.
#2
나는 국내 아니 전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회사를 참으로 오래 다니고 있다. 누군가를 만나 명함을 내밀어야 하거나, 다소 공적인 자리에서 자기 소개를 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나는 내가 좋은 회사를 다님을 인식한다. 상대방의 입으로 전해지는 “좋은 회사 다니시네요”라는 말만이 다가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좋은 회사’의 이름이 박힌 명함의 힘은 꽤나 쏠쏠하다. 구차해지거나 귀찮아질 일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내 명함과 내 얼굴을 왕복으로 왔다갔다하며 “0000?그런데 이 회사는 뭐하는 회사에요?”라고 물었을 때의 머쓱함을 겪을 일이 없다. 이 회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애써 설명해야 하는 귀찮음도 없다.
어느 심리학 교수는 명함을 내보이지 않고 자신을 얼마나 자세하게 그리고 흥미롭게 서술할 수 있는가가 진정한 성공의 기준이라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명함’은 살아있고 그것은 때로 ‘프리 티겟(Free Ticket)’이다.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이 그저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3
요즘 와서 달라지긴 했지만, 전통적인 명함은 회사의 이름과 부서의 이름과 내 이름이 적혀있을 뿐인 네모난 종이에 불과하다. 따라서 명함만으로 상대방이 어떤 일을 하는지 단번에 알아맞추는 것이 쉽지는 않다. ‘좋은 회사’의 이름이 박혀 있다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다. 명함은 그저 이름의 집합일 뿐이다. ‘인트로’에 불과하다. ‘본문’으로 이어져야 한다. 우리 각자가 하고 있는 일이 본문이다.
사실 내 명함을 건네받은 상대방으로부터 “어떤 일 하세요?”를 필두로 몇 가지 질문이 이어질 법도 한데 한국 사회에서 그런 일은 거의 없다. 적어도 내 경험상 그렇다. “좋은 회사 다니시네요”라는 거의 자동반사와도 같은 답변이 이어지고나면, 이와 관련된 몇가지 소소한 대화와 농담이 오가다가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씁쓸하지만 명함은 ‘내 일’을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 위치’를 설명해주는 일종의 신분증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따라서 “어떤 일 하고 계세요?”와 같은 질문도 희소한데, ‘이 일을 통해서 어떤 가치를 부가하고 있는지’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질문들이 서로간에 교환될 리 만무하다. 이 곳은 철학의 나라 독일이 아니었다. 한국이었다. 부끄럽게도 한 번도 질문받지 못한 나는 그래서 매끄러운 답변을 준비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내게 명함을 교환하는 시간은 우쭐한 시간이 아니라 부끄러운 시간이었다.
내 일을 한다면 분명한 확신에 차지 않더라도, 더듬더듬 거리더라도, 몇번은 세상에 나와서 업데이트를 거쳐야 할 답변이 내게는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답변되었어야 할 그 질문은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며, 이 일은 내 인생을 통해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였다.
#4
살면서 접한 사람들 중에서 자신이 하는 일을 가장 멋지게 정의하고 해석했던 사람은, 뜻밖에도 ‘복싱’을 하던 어떤 소녀였다.
복싱이라는 스포츠를 볼 때 나는 늘 궁금했었다. ‘스포츠’라는 미명 하에,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구석에 몰아넣고 수차례 주먹으로 가격하고서 상대방의 눈이 공포로 번뜩일 때서야, 마침내 플래쉬가 터지고 환호성이 터지는 스포츠였다. 아무리 심판이 있고 규율이 있으며 헤드기어와 권투장갑을 낀다고 해도 상대방을 주먹으로 직접 때리거나 치는 행위였다. 내게 복싱은 지금도 그 의문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폭력성’과 ‘잔인함’의 스포츠였다. 과연 ‘남을 때리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복싱 선수들은 어떻게 이 스포츠를 변호할 수 있을까? 아니 변호할 수 없다면 어떻게 스스로를 용인할 수 있단 말인가. 과연 ‘폭력성’을 압도하는 소명의식을 설명해 낼 수 있는 선수가 있을까?
#5
아주 어렸을 때, TV 화면에 나오던 복싱선수들은 눈이 퉁퉁 붓고 얼굴에 핏자국이 선명한 상태로 “가난해서 싸웠어요. 생계를 위해서 싸웠어요”라고 토해내듯 말했다. 배고픈 야수와도 같은 선수들의 얼굴에는 세상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다. 나는 겨우 초등학생이었지만 알 수 있었다. 저 선수들이 스포츠로써 복싱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 복싱에 이유는 없었다. 그냥 ‘가난이 싫어서 싸웠을 뿐’이었다.
#6
그런데 십년보다 더 예전의 어느 날, 나는 복싱에 대해서 놀라운 ‘해석’을 내린 엄청난 장면을 목격하게 됐다. 그것은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던 티브이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에서였다. 그 주인공은 ‘츠바사’라는 이름의 ‘소녀’에 더 가까운 어떤 여성이었다. “왜 복싱을 하세요”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러했다.
복싱이라는 스포츠를 통해 서로 당면한 인생이나 집념이
링 위에서 겨뤄진다고나 할까.
상대가 이기면 상대의 집념이 강했던 것이고
내가 이기면 내 집념이 강했던 겁니다.
제가 복싱을 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7
어쩌면 이 소녀에게도 가난이 링 위에서 포효할 수 있는 추동력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앳된 여성은 얼마나 자신의 일을 멋지게 해석해내고 있던지. 그녀는 자신의 주먹과 상대방의 주먹을 그저 삶의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주먹질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복싱은 상대방의 집념과 나의 집념이 서로 겨루는 장이라고 말하며 복싱을 통해서 각자의 당면한 인생이 서로 맞붙는 것이라고 해석해내고 있었다. 그 어떤 나이든 철학자의 현학적 수사보다 더 묵직했다. 그녀는 까만 밤톨 같은 커트머리와 발그스름한 볼을 가진 고작 2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8
‘집념’이라는 말은 얼마나 오랜만인가. 우리 사회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으면서 이 자리를 영원토록 유지하겠다는 이들과, 지금은 꼭대기 언저리이지만 진짜 꼭대기에 올라가겠다는 이들의 악착 같은 집념만이 가득한 세상이었다.
진짜 집념다운 집념은 너무 간만이었다. 그것이 ‘돈’으로 명백하게 보상이 되지 않는 한, 우리는 한 사람의 지난한 노력을 촌스럽다고, 또,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너무나 쉽게 평가내린다.
난 '집념과 집념의 대결'이라는 말에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쓰바사가 자신의 일을 정의내리고 해석해내는 힘이었다. 또한 남들이 가지 않는 길에 대한 분명한 이유의 존재였다. 일본에 사는 이 여성도 우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자가 왠 복싱이냐고, 왜 돈도 안되는 복싱을 하냐고, 왜 남들처럼 편하게 살지 않느냐는 목소리를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돈 안 되는 일을 왜 하고 있느냐며 타박하는 사람들. 남들과 똑같이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바로 내 곁에서 목소리를 높이는사람들. 하지만,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9
나는 언제쯤이면 내가 하는 일을, 그리고 내 삶을 츠바사처럼 정의해낼 수 있을까. 명함 속에 선명하게 부각된 회사 이름 옆에 아무 컬러 없이 검정색으로 무표정하게 서있는 내 이름 말고, 나는 정말로 내가 정의하는 나를 갖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