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쌤 덕분이에요.

임진모 쌤에게 전하는 20년 만의 고백

by KeepWhatMovesMe

쌤은 나를 기억할까?


<위대한 뮤지션 100인전> 전시가 열리는 삼성동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 연신 심호흡을 했다. 쌤은 나를 기억할까? 벌써 20년도 넘게 시간이 지나버렸는데.


하지만 나를 기억하느냐의 여부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당신에게 감사함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동안 찾아뵙지 못한 나의 잘못이지 다른 어떤 것과도 연관되어 있지 않으니까.


왜 그토록 고마운 분께 이렇게나 오랫동안 연락도 드리지 못하고 살았을까. 내 모든 진심이 들어간 일기장에는 꽤나 자주 등장했던 당신인데 말이다. (새삼 나는, 마음에서는 늘 누군가를 존경하고 애정하느라 분주하지만, 그것을 챙기고 표현하는데 게으른 사람이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에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SNS 피드 통해서 우연히 알게 된 <위대한 뮤지션 100인전> 이라는 전시회. 전시회의 제목은 내가 도저히 클릭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것이었고, 그것보다 더 내 마음을 잡아 끈 것은 '음악평론가 임진모 씨의 도슨트'라는 구절이었다.


그 순간 20여년 전, 뭔가 퀴퀴한 냄새가 가시지 않던 - 하지만 그런 건 전혀 상관 없었던 - 신촌인지 대학로인지조차 확실치 않은 어느 강의실의 장면이 재생되었다. 쌤의 목소리, CD Player가 재생되던 소리. 나를 비롯한 우리가 숨죽이며 들었던 그 음악들. 사실 나는 명확히 알고 있다. 내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 모든 음악적 순간들의 상당 부분은 실은 그때 그 강의실에 빚지고 있다는 것을. 언젠가는 쌤에게 말하고 싶었다


"사실, 쌤 덕분이에요"


순도 100%로 가득한 시간의 시작


"죄송합니다. 이 강의는 폐강되었습니다."

한겨레 문화센터 직원의 말에 강의실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팝음악 평론가 임진모와 함께하는 대중음악 평론가 과정>. 10번의 강의로 이루어진 이 수업을 신청한 나는 설레임과 긴장이 뒤섞인 채로 신촌의 한 강의실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딱봐도 락음악 덕후 같은 아우라를 풍기는 남자 대학생 10여명과 함께. 그리고 그런 아우라는 전혀 없는 모범생 타입인 나는 혼자 조용히 앉아 있었고.


'평론가'까지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좋아한 팝음악이라는 세계의 진수 또는 그 세계를 관통하는 어떤 체계를 알 수 있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되니 설레임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상한 긴장감도 있었다. 도대체 평론가를 하겠답시고 이 강의를 찾아온 이 덕후스러운 남자들은 나보다 얼마나 많이 음악을 들었을 것이며, 속으로 '아, 괜히 나의 얕은 지식이 드러나면서 좌절하는 거 아닌가?' 하는 괜한 걱정. 하지만 문화센터 직원의 저 말에 설레임과 긴장도 그냥 소용없어졌다. '음, 인연이 아니었구나'라고 일어서려는 순간.


갑자기 TV에서만 보던 그분이 강의실로 들어오셨다. 팝음악 평론가 임진모 씨였다.

"자 여러분, 이 강의는 취소되었지만, 꼭 여기서 강의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저희 다른 곳에서 이 강의를 지속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여러분 동의하세요?"


그렇게,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도 100프로의 시간들'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아울러 TV에서 보던 '음악 평론가 임진모'가 내게 '임진모 쌤'이 된 역사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음악 말고는 아무것도 상관없던 시절


기억이라는 건 참 간사해서, 20년이란 시간 동안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저절로 윤이 나고 색이 더해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내 삶에서 가장 온전히 행복했던 시간을 꼽자면 이 시간들이 늘 최상위권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라도 온 힘 다해 그 시절을 복원해보려 한다.


솔직히 장소는 가물가물하다. 신촌이었나, 대학로였나. 나중에 신길역 근처로 옮겨갔다는 것만 선명하다. 어느 건물의 지하, 하얀 형광등이 내리쬐는 공간에 놓인 딱딱한 의자들. 그 불편한 의자에 앉아 음악을 듣고, 그 음악이 태어난 시대적/문화적 배경을 듣고서 서로간의 연관성을 파악하고, 그리고 그 음악이 시간을 흘러 지금 이 강의실에 도달하여 우리에게 주는 감동에 꽤나 벅차하던 순간.


나는 분명 시계를 훔쳐봤을 것이다.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면 이상하게 불안해지기도 하는 나의 오래된 습성이다. 이 시간이 끝나지 않기를 너무나 바랐던 것 같다.


쌤이 준비해오신 커리큘럼은 체계적이었다. 처음엔 음악 장르별로 10-20회차 강의가 이어졌고, 그다음엔 특별한 테마들로 깊이 들어갔다. 가끔은 강헌, 이무영, 박무석 같은 쟁쟁한 평론가들이 게스트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렇게 그 과정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나는 2년 정도 그 수업을 들었던 것 같다.


20250823_175137.png 당시의 강의노트! 무려 세기말의 노트다!

지금처럼 구글 검색 한 번이면 모든 걸 알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쌤이 말씀하신 한 마디 한 마디, 들려주던 한 곡 한곡이 어렵게 얻은 선물일 수 밖에 없었다. 강의실에서는 노트 가득 필기를 했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 휘갈겨 쓴 노트를 워드프로세서로 정성스럽게 다시 정리했다. 수업에서 언급된 음악들을 찾아 듣기 위해서 소리바다나 해외의 불법 음악 다운로드 사이트를 뒤져서 한곡 한곡을 모두 다운로드 받았던 것 같다. 한 곡을 듣기 위해서도 이렇게 많은 수고로움이 필요했지만, 그 과정 자체가 설렜다.

때마침 인터넷을 통한 음악 서비스가 막 태동하던 시기였다. 지금까지 책 속 텍스트로만 존재하거나 비싼 레코드판이나 CD를 사야만 들을 수 있던 그 수많은 음악들이, 클릭 몇 번만으로 내 방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 속에서만 존재하던 음악들이 지금, 여기, 내 현재의 삶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그 순간. 그 흥분과 설렘이란.


그때부터 읽기 시작한 음악에 관한 책들이 락음악 → 재즈 → 클래식으로 확장되었다~


지식보다 더 큰 선물


쌤이 우리에게 준 지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쌤은 '인간'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음악에만 매몰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난 그래서 쌤이 좋았다.


어느 연말 크리스마스에는 금호동에 있던 선생님 댁에 우리 모두를 초대해서 파티를 열어주셨다. 거실 가득 2-3개 상들을 이어서 펴고, 사모님이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음식을 나누며 보낸 그날. 철없는 20대였던 우리는 그저 앉아서 받기만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큰 정성이었을까 싶다.


경기도의 어느 곳에 1박 2일로 MT를 갔던 것도 기억난다. MT 가기 전에 그동안 수업에서 가르쳐주셨던 내용을 기반으로 음악 퀴즈를 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으셨는데 그 음악 퀴즈에서 내가 1등을 했던 것도 기억난다. '평생 락음악만 듣다 온 거 같은 저 박학다식 덕후 오빠들보다 음악은 내가 적게 들었을지라도, 쌤 수업을 나만큼 열심히 들은 사람은 없구나'라며 혼자 괜히 으쓱해하던 기억도 생각나고^^.


우리 수업을 함께 듣던 선배 언니의 짝사랑 고민까지 본인 일처럼 들어주시고 조언해주시던 기억도 생생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쌤은 경향신문 기자라는 탄탄한 자리를 박차고 나와 홀로 새로운 길을 걷고 계셨다. 그런 분에게 우리는 열정 가득했다 하더라도 그저 미성숙한 아이들이었을 수 있는데, 쌤은 참으로 진심이었다.


도대체 몇 개의 별들이 일렬로 늘어서야 가능한 기적이었을까. 수많은 강의 중에서 하필 그 강의에 내가 신청하게 된 것도, 폐강 위기가 오히려 우리를 한 덩어리로 뭉치게 한 것도, 쌤의 뜨거운 열정과 우리의 목마른 갈증이 딱 맞아떨어진 것도.


강의가 끝나면 자연스레 근처 술집으로 몰려갔다. 비틀즈냐 VS 롤링 스톤즈냐, 오아시스냐 VS 블러냐 등의 치기어린 논쟁을 하다가 비슷한 취향의 소그룹으로 또 쪼개져서 또다시 밤새 음악에 대해서 얘기하다가 대중교통은 끊기고 택시 탈 돈은 없어서 새벽까지 오는 지하철을 기다리고 하면서 그렇게 20대를 보낸 것 같다. 그리고 당시의 우리들 중에서 많은 수가 지금 한국의 대중음악계에 기여하는 전문가로 성장했다.


그 시절 친구들, 그리고 지금


그 시절을 떠올리면 사진이 아니라 영화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순간들이 있다.


카셋트테이프로 쌓아올린 무덤을 본 적이 있는지?

그 모임에서 친해진 후배의 방에 놀러갔을 때의 충격이란. 천장 높이 2/3까지 쌓인 카셋트테이프들이 방 부피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Queen의 'Bohemian Rhapsody' 들어보자"는 내 말에 그 후배는 주저하지 않고 그 테이프 무덤 속으로 팔을 깊숙이 들이밀어 팔을 몇번 휘젓더니 원하던 앨범을 찾아냈다. 마치 자신의 보물창고를 뒤지는 해적처럼. 그 친구는 지금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꽤 알려진 전문가가 되었다.


또 다른 친구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낸 적이 있었다. 그 친구 방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LP들, 그리고 밤이 새도록 레코드판을 갈아끼우며 "수영아, 너 이것도 들어봤어?"를 반복하던 그 들뜬 목소리. 첫 수업 때 길다란 베이스를 메고 나타나 내 호기심을 자극했던 그 동갑내기 친구는, 지금도 내 곁에 소중한 친구로 남아있다. 해외 아티스트 내한공연이 있을 때마다 함께 달려가는, 20년을 이어온 소중한 음악 동반자로 말이다.


쌤은 여전하셨어


20년 후, 《위대한 뮤지션 100인전》이 열리는 그 전시장에서.


쌤은 처음엔 나를 알아보지 못하셨다. 하지만 이름을 말하는 순간, "아, 우리 수영이!" 하시며 환하게 웃어주셨다. 2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 수영이'라고 부르시는 쌤. 그 한 마디에 담긴 변함없는 애정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쌤은 예전보다 많이 작아 보이셨다. 시간이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키는구나 싶어 묘한 슬픔이 밀려왔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음악 앞에서 빛나는 그 눈빛과 목소리. 도슨트를 하시는 내내, 20년 전 그 골방 강의실에서 쏟아내던 바로 그 열정은 그대로였다.


"여러분, 음악 좋아하는 사람 중에는 나쁜 사람이 없습니다. 비틀즈를 그렇게 사랑하는데, 그런 사람이 사람 죽일 수 있을까요?"

"이 음악 안 들어본 분이 사망하면요, 슬프겠지만요, 그분 장례식에는 못 갑니다."


여전한 유머, 여전한 진심. 아, 어떤 것들은 정말 시간을 뛰어넘는구나.


그 순간 깨달았다. 끝난 줄 알았던 그 수업은 사실 지금도 내 안에서 계속되고 있었다는 것을. 음악으로 위로받고, 음악으로 힘을 얻고, 음악을 통해 삶을 바라보는 이 모든 방식들이 사실은 쌤에게서 시작된 것이었다는 것을.


사실, 쌤 덕분이었어요. 제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들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쌤을 만나던 날, 드렸던 꽃 그리고 카드




///기억의 플레이리스트///


R.E.M의 마이클 스타이프 & 10,000 Maniacs의 나탈리 머천트가 함께 부른

'To Sir With love'

https://youtu.be/uou3SpzKVYw?si=WIIfikpfQGvRrpVs


너무나 좋아하는 R.E.M의 마이클 스타이프 & 10,000 Maniacs의 나탈리 머천트가 함께 부른 이 노래

이 노래의 가사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But in my mind, I know they will Still live on and on.

하지만 내 맘 속에서, 그 날들은 영원히 살아 있을 거에요.


역시나, 가장 보편적인 저런 가사들이 실은 내 얘기고, 우리 얘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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