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日. 여행 불호(不好)

예민한 사람을 위한 여행 지침서

by 구 벨

또래 월급쟁이들에게 사막 속 오아시스 같은 ‘여행’이 구 씨에게는 그리 달가운 보상이 아니다.


물론, 이는 지난주 거의 일주일을 꼬박 해외여행에 다녀온 구 씨가 할 말은 아니긴 하다만

사실 이 해외여행도 2019년 이후로 6년 만에 다녀온 것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피치 못하게 하늘길이 닫혀버린 외부사정도 있었지만, 그 이후에도 갈 기회는 얼마든지 많았다. 그럼에도 구 씨는 그다지 여행을 좋아하지 않기에 굳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29세,

어른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새파랗지도 않은 어정쩡한 사회인의 나이이다.

특히, sns의 발달과 아직은 미숙하게 사회생활을 하며 생기는 스트레스로 인해 구 씨의 주변인들도 정말 여행을 활발하게 다닌다.

평균적으로 1년에 1번 정도는 국외 여행을 가는 것 같고 일본과 같은 근거리 국가는 1년에 2-3번씩 가는 경우도 다반수다. 또, 국내 여행은 적어도 여름과 겨울 한 번씩은 꼭 가는 것이 특징인 것 같다.

그렇기에 사회생활 시 가벼운 대화를 할 때 주로 나오는 질문 중 하나인 "여행 좋아하세요?"에 보통 상대방은 여행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의도한 경우가 많았으므로, 대답하기 난감할 때가 종종 있다.


구 씨가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한마디로 말하면 '예민해서'이다.

예민하다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자극에 대한 반응이나 감각이 지나치게 날카롭다'라고 나와있다.

즉, 동일한 시간과 장소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살갗에 더 깊숙이 파고든다는 의미인 것 같다.

예민하신 분들은 공감하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일정한 비율의 ONOFF가 필요하다.

타인에 비해 외부 자극에 민감하고 더 깊숙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를 환기하고 스스로를 재정비할 수 있는 OFF 시간 및 공간도 일정 비율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행은 기존에 익숙해져 있던 생활반경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의에 의해 낯선 환경에 놓여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느끼는 일련의 과정을 통틀어 여행의 묘미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구 씨와 같이 예민한 기질의 사람들은 여행 기간 동안에는 평소보다 OFF 할 수 있는 시공간이 줄어들기 때문에 수확철 지난 배추 찌꺼기 마냥 허옇게 질려버린다.

별것도 아닌 것에 짜증이 나고, 말투도 날카로워지며, 눈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고난길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구 씨는 동행자들에게도 미안해지고, 스스로에게도 지쳐 점차 여행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살면서 여행을 한 번도 안 가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기에

구 씨는 그동안 여행을 다니면서 터득한 점들을 모아, 예민한 사람을 위한 여행 지침을 만들었다.

실제로 이 중 몇 개를 적용한 덕분에 구 씨는 지난주에 꽤나 긴 해외여행을 아무 문제 없이 즐겁게 다녀왔고, 다른 부분들도 국내 여행 시 몇 번 적용해 본 후 그 효과를 경험한 것이기에, 끌리는 것이 있다면 선택하여 실행해 보길 바란다.


첫째, 여행 기간은 최대한 짧게 하는 것이 좋다.

구 씨가 가장 선호하는 기간은 1박 2일이다. 국내 여행은 대부분 1박 2일로 가는 편이며, 2박 3일 이상으로 여행 기간이 길어질 지역은 구태여 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여행 기간이 길수록 온전히 OFF 할 수 있는 시공간 확보가 어렵기 때문이다. 예민한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외부 자극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안전기지(Safe Zone)가 반드시 필요하다. ON에서 다양한 자극을 받은 만큼 OFF의 비율도 안정적으로 확보될 때 자극을 처리하고 다시 평온한 정서 상태로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같이 원거리 여행을 가게 되어 피치 못하게 여행기간이 길어진다면 다음에 나올 지침들을 고려해 보자.


둘째, 여행지 선택 시 지나치게 낯선 환경은 삼가자.

여기서 구 씨가 생각하는 낯선 환경은 현재 본인이 생활하는 환경과 크게 다른 곳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구 씨가 사는 곳이 고층 빌딩이 즐비한 서울의 한복판인데 여행지 선택 시 몽골 사막투어를 한다면 스트레스를 받을 확률이 매우 높다. 물론, 새로움을 접하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도 있겠지만 타인보다 외부 자극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타입이기 때문에 텁텁한 날씨, 신발에 자꾸만 들어가는 모래, 밤에 마주하는 수많은 낯선 곤충들에 금방 지쳐버릴 것이다.

이처럼 구 씨는 스스로의 성향을 잘 알기 때문에 국내 여행이든 해외여행이든 여행지를 선택할 때 서울과 비슷한 도심지를 고른다.

'그럴 거면 뭐 하러 여행을 가냐'는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지만, 그럼 뭐 어떤가? 여행에 정답은 없다.

도심지에서도 얼마든지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며 무엇보다 덜 긴장한 상태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구 씨에게 안정감을 준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페트로나스 트윈타워

셋째, 평소에 자주 입는 편한 옷과 신발을 1세트 정도는 가져가자.

여행에 오면 남는 게 사진이라는 말도 있기에 구 씨는 여행 갈 때마다 늘 옷차림에 굉장히 신경을 쓰는 편이다.

화장부터 액세서리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고르고 멋진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 찍을 스스로를 상상하면서 그 과정에 공을 들인다.

그럼에도, 항상 추가로 챙겨가는 것은 평소에 자주 입는 편한 옷과 신발 1세트이다. 이는 잠옷이 아닌 일상복으로 입을만한 수준의 것을 의미하며 활동성이 높은 옷이면 더 좋다.

그 이유는 보통 사진이 잘 나오는 예쁘고 멋진 옷들은 활동성이 낮아 불편한 경우가 많은데, 가뜩이나 외부 자극에 민감한 예민한 사람들에게는 낯선 환경과 더불어 이 또한 스트레스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인이 평소에 편안하게 입던 옷과 신발을 한 벌 정도 가져가면 예민한 상황에서 이것이 임시 안전기지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예민한 기질을 포용할 수 있는 사람과 가자.

이 말은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함께 여행하는 사람을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쓰자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구 씨와 같은 예민한 기질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둔감해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애초에

관계를 잘 유지하고 싶은 사람과는 여행을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함께 여행을 감으로 인해 본인의 사회적 위신에 해가 될 것 같거나, 친목이 어그러질 것 같다면 아예 여행을 제안하지도, 제안을 받더라도 가지 않는다. 그래서 구 씨가 이번 여행에서 선택한 동행인은 남동생이다. 어쩌면 부모님보다도 더 서로의 속내를 잘 알고 있고 약간 짜증을 내거나 힘든 내색을 하여도 구 씨의 사회적 평판이 깎이거나 친목이 저해될 일이 없다.

만일 그런 동행인이 없다면, 혼자 가보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외로울 수도 있겠지만 본인의 예민한 기질로 인해 타인에게 피해를 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오히려 OFF 할 시공간을 자유롭게 가질 수 있어 매력적인 대안으로 보인다.


위에 제시한 4가지 방법은 구 씨처럼 예민한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무딘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수많은 취향들 중 하나일 뿐이며,

여행을 간다고 하더라도 꼭 보편화된 방식이 아니라 얼마든지 개인 특성에 맞게 조립하여 취할 수 있다.

그러니 예민한 사람들이여, 꼭 쉬는 날 여행을 가지 않아도 괜찮다.

만일 여행을 가야 한다면, 구 씨처럼 자신만의 지침서를 만들어 그에 맞춘 안정적인 여행을 해보자.

다양성의 시대이지 않은가?





*이미지 출처: 작가본인 및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