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日. 클래식도 내 입맛대로

음악 문외한 구 씨의 상황별 플레이리스트

by 구 벨

* 이번 글은 눈과 귀를 함께 사용하시면 더욱 생동감 있는 감상이 되실 거라 생각합니다.




한껏 차가워진 공기만큼 조금이라도 새어드는 바람을 필사적으로 막고자 한 의지가 열렬히 느껴지는 롱패딩들의 향연이 가득한 이곳은 출근길 지하철이다.


구 씨는 이 모든 것이 짜증 난다.

이른 아침이라는 점도, 출근길 한복판에 놓여있다는 점도, 그리고 온갖 재료들을 쑤셔 넣어 보온력을 높인 패딩들끼리 맞부딪히며 고압 프레스에 눌린 점토처럼 찌그러져 있는 모든 상황이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그래, 이런 상황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하고 이내 구 씨는 잔뜩 찌푸려진 미간을 다독이기 위해 에어팟으로 양쪽 귀를 틀어막는다.

처음으로 흘러나오는 노래는 파가니니의 '라캄파넬라'다.

출처: TV예술무대 유튜브

https://youtu.be/CsKZmUcQOzg?si=uGGbLyQ-Sywj636L


격정적으로 요동치는 심정을 그대로 대변해 주듯 현란한 바이올린 연주가 구 씨의 심장을 뛰게 한다.

구 씨는 이렇게 스트레스가 치솟는 상황에서는 이를 속 시원하게 해소할 수 있는 역동적인 클래식을 듣는 편이다.

따라가기 벅찬 속도를 뽐내는 라캄파넬라 바이올린 선율에 '준비-시작!' 해서 겨루던 초등학교 때의 100m 달리기가 떠오른다.

그 짧은 순간에는 일시적으로 주변의 모든 것이 차단된 느낌을 받는다.

응원하는 사람들도, 날씨도, 시간도, 하다못해 본인이라는 존재조차 흐려진다.

이와 흡사한 느낌을 출근길 지하철에서 더듬던 구 씨는 끝을 향해 달려가는 라캄파넬라를 아쉬워하며 빠르게 다음 곡을 고른다.


이번에도 파가니니의 곡이다.

출처: itzhakperlman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YxPTb0I3SrU


역시나 이번에도 굉장히 빠른 선율 흐름을 자랑하는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No.24 Paganini-24 Caprices Op.1'이다. 실제 연주 시간은 4분 남짓인 듯한데 휘몰아치는 속도감으로 인해 1분도 되지 않아 노래가 끝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구 씨의 귓속에서 긴박하게 돌아가는 파가니니 플레이리스트에 어느 정도 내성이 생길 때즈음

지난여름, 비가 말 그대로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사납게 내리던 장마철에 드라이브를 하며 차 안에서 어머니와 들었던 곡이 떠올라 곧바로 재생한다.


바로 비발디의 '사계 中 겨울 - 1악장'이다.

출처: The Classical Music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j9x5M5gldrI


너무나 유명하고, 귀에 익은 선율이기 때문에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특히 구 씨는 출근길, 여름 장마철, 또는 어머니와 드라이브를 할 때 들으며, 이 곡은 상황과 여건이 된다면 스피커를 통해 크고 웅장하게 즐기는 것을 선호한다.

이를 듣고 있다 보니 구 씨의 얼굴에 스피드 카 레이서의 헬멧이 써진다.

언제 출발했는지 알 수 없게 이미 미친 듯이 질주를 하고 있다. 양 옆에 경쟁자들이 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스스로도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엑셀을 최대치로 밟아 앞만 보고 달린다.

결승선에 멋지게 도착하여 땀에 젖은 헬멧을 벗어던지는 머릿속 영상이 흐릿해질 때즈음 이와 함께 바이올린 선율도 움직임을 멈춘다.


교통카드를 찍고 개찰구를 통과하여 지하세계를 탈출한 구 씨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끼며 직장 건물이 나올 때까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을 재생한다.

출처: Filippa Giordano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yHGN3WanzeU


이 곡은 구 씨가 무려 7살 무렵부터 우연히 접한 뒤로 현재까지 쭉 듣고 있는 조르주 비제가 작곡한 4막의 오페라 '카르멘(Carmen)의 L'amour est un oiseau rebelle (Habanera) (하바네라 - "사랑은 자유로운 새")'이다.

구 씨는 카르멘 오페라를 본 적도, 내용도 잘 알지 못하지만 하바네라는 특히 'Filippa Giordano'가 부른 노래로 처음 만나 바로 매료되었다.

맑고 투명하게 주문을 거는 듯한 첫 구간에 정신이 몽롱해지다가도 다 함께 갑자기 떼창으로 '바 하하하!' 하는 구간에서는 실제로 7살 구 씨의 여린 심장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 놓았다 강약조절의 선수인 이 노래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고, 매일 새롭게 구 씨를 매혹시킨다.

회사 건물이 가까워질 때즈음 구 씨는 퇴근 후에 집에 가서 하바네라가 담긴 20년도 더 된 CD를 플레이어로 한번 더 들으리라 다짐한다.

Filippa Giordano 음원 CD

하바네라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접하게 되어 구 씨가 양대산맥과 같이 또 즐겨 듣는 곡이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다.

그것은 바로 양방언의 'Frontier!'이다. 이 곡은 온전한 클래식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구 씨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classic 하게 듣고 있기에 플레이리스트에 넣었다.

출처: KBS 전주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_9gmKbLWBmU


처음에 기세 좋게 밀고 들어오는 사물놀이 소리에 구 씨의 눈앞에 경복궁이 드론 시점에서 드넓게 펼쳐지는 듯하다. 쨍하니 존재감을 드러내는 태평소 소리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즈음에

귓가에 갑자기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당시 미취학 아동이었던 구 씨는 음악을 초등학교 교육과정에서 배우기 전에 이러한 국악과 서양의 오케스트라가 혼합된 퓨전음악을 접하게 되어 신선한 충격을 받아 버렸다.

마치 원시시대 사람들이 처음으로 불을 발견하여 몸이 덥혀짐을 경험했을 때 느꼈을 놀라움이 이렇지 않았을까.

그 정도로 새로운 경험이었기 때문에 이 곡 또한 출근길의 경쾌한 플레이리스트이면서 가장 좋아하는 곡 중 하나이다.


한참 하바네라와 Frontier! 의 선율에 심취해서 걷다가 보니 마침 강아지와 산책을 하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구 씨는 자연스레 집에 두고 온 반려견 찌구가 떠오르면서 오늘 밤에도 찌구와 클래식을 들으며 잠들 것을 본인에게 상기시킨다.

그렇다. 구 씨는 자신이 사랑하는 반려견에게 클래식을 선사하는 것을 좋아한다.

구 씨의 반려견은 익숙하지 않은 주변 환경에 놓여 있을 때에는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했던 클래식 위로법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구 씨의 반려견 ‘찌구’

구 씨는 반려견이 심신을 이완할 수 있도록 빠르기가 느린 편이고, 음정 변화의 폭이 넓지 않은 드뷔시의 '달빛(Clair de Lune)'이나 '아라베스크(Arabesque No.1)', 또는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中-제13곡 백조(Le Cygne)'를 틀어준다.

출처: Classical Music Collection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KuGrV0ADzOQ

출처: CBC Music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FZ8X2HS_low


특히, 생상스의 백조는 하프 선율이 너무나도 우아하고 부드럽게 찌구를 잠의 세계로 이끈다.

그리고는 그 모습을 보며 흡족해진 구 씨도 곧 반려견을 따라 잠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이다.


잠잘 때뿐만 아니라, 구 씨는 산책할 때에도 날씨가 좋은 봄이나 가을이면 벤치 의자에서 반려견을 잠시 무릎에 앉혀놓고 듣는 곡들이 따로 있다.

적당하게 산들거리는 바람의 소리와 촉감을 느끼면서 부드럽게 은빛 털을 날리는 찌구를 쓰다듬고 있노라면 구 씨는 쇼팽의 '녹턴 2번(Nocturne Op.9 No.2)'이나 에릭 사티의 '짐노페티 제1번(Gymnopédies No.1)'을 재생하게 된다.

출처: 크클클TV - 크레디아 클래식 클럽TV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tTGEo3scnq8

출처: KBS교향악단

https://www.youtube.com/watch?v=pIbXrpy4EHY


이 두 곡 모두 유명한 곡이기도 하고, 구 씨가 산책할 때 시도해 보았던 그 어떤 곡들보다도 '좋은 날씨'와 '산책'이라는 두 단어와 궁합이 좋다. 그래서 이 두 곡은 구 씨가 산책할 때 반려견과 함께하든 그렇지 않든 꼭 듣는 플레이리스트이다.

곧 다가올 봄에 하늘하늘 떨어지는 벚꽃 잎 아래에서 찌구와 함께 맞이할 녹턴과 짐노페디를 생각하니 완전한 행복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른다.


음악으로의 도피도 잠시, 어느덧 회사에 도착하여 사무실에 들어선 구 씨는 아쉬운 마음에 조금은 느긋하게 귀에서 에어팟을 뺀다.

'클래식이 이 정도로 내 삶의 필수요소였나'

하고 새삼스레 음악 문외함임에도 이렇게 음악과 가까워질 수 있음에 신기해하며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하기 전 심혈을 기울여 퇴근길 플레이리스트를 골라둔다.



* 이미지 출처: 유튜브, pinterest, 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