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때려치운 MZ의 진로탐색기 (1탄)

너 그러다 뭐 될래? -> 뭐(모)든!

by 구 벨

혹, 제목만 보고 나에게 진로 관련한 뾰족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면

죄송하다. 사실, 그런 건 남한테 찾으면 안된다.

어제까지만 해도 미래에 대한 걱정을 애꿎은 친구에게 푸념한 나이기에,

나도 아직 방황의 과정을 겪어내고 있는 평범한 20대 직장인임을 먼저 밝힌다.


이번 역은 판교, 판교테크노밸리역입니다.

봄이 오는 설렘을 간직한 2월,

새빨간 노선의 신분당선을 타고 판교역 4번 출구를 나오자마자 보이는 풍경은 2050년쯤 되는 미래도시에 와있는 것 같은 착각을 주는 마천루들뿐이다. 회사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줄 바로 옆에는 으리으리한 카카오(KAKAO) 사옥과 귀여운 춘식이가 보이고, 목에는 각 회사의 이니셜이 새겨진 반짝이는 사원증을 건 사람들이 보이고, 그 줄 끝에는 굳어있는 표정의 내가 서있다.


그렇다.

나는 어릴 때부터 본래 호기심도 많고, 남들이 하지 않는 잡다한 일을 벌이는 것을 좋아했지만,

고3이라면 피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입시제도와 부모님의 불같은 성화로 인해

방황하는 사춘기를 보내다 그냥저냥한 대학에 진학했고,

전공이 재밌어서 어쩌다 보니 대학원 졸업장까지 손에 쥐었으며,

살다 보니 감사하게도 나의 업계에서는 top 3 안에 손꼽히는 직장에 정규직으로 취업하기까지 성공했다.

그리고, 그랬던 내가 3개월 만에 직장을 때려치웠다.


물론, 처음부터 퇴사 생각을 했던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판교역에서 20-30분 정도 걷다 보면 '금토천교'라고 하는 봄 벚꽃이 흐드러진 예쁜 산책로가 있는데 매일 출근길에 그 길을 지나며 산들바람을 맞는 것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또, 건물을 들어갈 때 사원증을 찍으면 '철-컥'하고 문 열리는 경쾌한 소리와 복지로 제공되는 사내카페(나 같은 카페인 중독자들에게는 커피값이 들지 않는 것이 천국 같았다), 매일 한식/중식/일식/양식으로 나눠서 제공되는 구내식당, 성과급으로 제공되었던 A사 태블릿, 경조사 때 제공되는 두둑한 상여금, 특별 이벤트가 있는 날에는 전 직원에게 제공되는 고급호텔 뷔페까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해 보였기 때문이다.

야근 전 먹었던 구내식당 야끼우동

퇴사하고 나서 부모님을 포함한 지인들이 나에게 입을 모아 했던 말은 "너무 아깝다 조금 더 버텨보지",

"네가 세상 물정을 아직 모른다."였다.

물론, 응원해 주고 격려해 준 사람들도 많았다.

아니, 사실 놀란 사람들이 더 많았다. 평소에 무언가 몰입할 때 열정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쏟아붓고, 완벽주의가 강한 편이라 매 순간 책임감 있게 살아오려 노력했고, 특히 내가 진실되게 애정을 표현했던 분야라 그랬을 것이다.


처음에는 너무 놀랐어.. 언니 같은 사람이 나왔다고 해서….

사실, 퇴사 사유는 간단하다.

그곳에서 보내는 매 순간 나의 존엄성이 사라지고 있었고, 거울 앞에 서면 인간성을 포기한 괴물이 보였기 때문이다.

업무를 할 때 아무런 성취감도 들지 않았고, 비효율적이라고 느껴지는 업무 시스템 내에서 서로의 잘못을 잔인하게 물어뜯고 사냥하기만 바빴으며, 그럼에도 윗선에서 직원들에게 거는 높은 기대치는 숨이 턱턱 막혔다.

말 그대로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고, 아무런 의욕도 들지 않았으며 심할 때에는 삶 전반에 대한 회의감까지 들었다.

3개월 만에 체중이 10kg 가까이 빠지면서 정신 및 신체 건강이 악화된 건 오히려 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퇴사할 때, 마지막에 내가 정말 존경했던 상사가 나를 꼬-옥 안아주며 해준 말이 아직까지도 잊히질 않는다.


OO 씨는 다른 사람들보다
열정의 용량이 더 많은 것일 뿐이야.

다른 사람들이 10 정도라면
OO 씨는 50 정도랄까?

원래 열정이 많은 사람들은 그걸 분배해서
쓰는 게 서툴고
실제로 굉장히 어려워.

그래서 나는 OO 씨가 꼭 정말
큰 사람이 될 것 같고
반드시 크게 성공할 것 같아.

내가 이 업계에 있으면서
20년 넘는 동안
사람을 한두 번 써본 게 아니니까
나 믿어도 돼

물론, 위로 차원에서 해주신 말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이 말은 나에게 큰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나에게 ‘성공’이라는 허상은 중요하지 않다.

이를 기점으로 나는 남들에게 보이는 가치가 부질없음을 뼈아프게 배웠고

나에게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성취감’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안다.

직장에서 성취감, 자아실현 운운하는 게

얼마나 현실감 없고 한심한 생각인지.


그럼에도,

아직 젊어서인지,

그냥 겁대가리가 없어서인지

나에게는 그게 가장 큰 동력인 걸 어쩌겠나.


덕분에 요즘은 사실 불안감보다는 매일이 설렐 때가 더 많다.

오늘은 무엇을 해볼까, 어떤 책을 빌리고, 내 미래를 위해 어떤 걸 배워볼까 등을 생각하느라 벅차다.


어떻게 이런 멘탈이 가능할지 곰곰이 분석해 보니, 나는 중심축이 꽤나 단단한 사람인 것 같다.

특히,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자주 하고, 주제파악을 잘하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만 건드리는 편이다.

그래서 퇴사 이후 내 눈앞에 펼쳐진 길들은 아직 덜 다듬어진 원석처럼 보인다. 어떤 원석부터 먼저 갈고닦아 보석으로 탈바꿈시켜 볼까, 매일매일 고민하는 것이 즐겁다.


그럼, 지금은 뭐 하고 살고 있는데?
그리고 어떻게 살 건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당신을 위해, 또는 나처럼 방황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MZ들을 위해

부끄럽지만, 다음 글에서는 지금의 이런 나를 만들어 낸 성장 배경과, 내가 진로 설정 시 고려하는 점 등을 나눌 예정이다.


글을 마치며, 혹 자유를 선택한 당신에게 초대하지 않은 불안감이 불쑥 고개를 내밀 때 들으면 좋을 곡 하나를 추천한다.

‘위대한 쇼맨’ (휴잭맨 주연의 뮤지컬 영화 넘버) 中 The other side - Hugh Jackman & Zac Efr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