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기보다는 불행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가끔 잊곤 한다.
나의 하루가 얼마나 평범했는지.
아침이 되면 온몸이 뻐근하고, 아이의 투정을 받아내며 그들의 아침까지 챙기는 일상. 그렇게 하루를 시작해 정신없이 동료들에게 인사를 하고 모니터 전원을 꾹 누르며 시작하는 일상. 그리고 퇴근 시간이 되면, 신발을 갈아 신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오늘 저녁엔 또 뭘 먹을까 비장한 고민을 하는 마무리.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여보세요?"
"은희가 죽었대."
너무 예뻤던 아이였다.
아주 가까운 가족이었다.
'어느 날'이라는 단어 뒤에 '갑자기'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이유를 알았다. 갑작스러운 일은 예고 없이 일어나기에. 은희는 꽃다운 나이에 사고로 우리 가족을 떠났다.
은희와의 헤어짐으로, 은희를 보내는 가족들의 모습에서 후회, 원망, 미안함 그 이상의, 이 세상 어떤 단어로도 써 내려갈 수 없는, 지옥에나 존재할 것만 같은 감정을 보았다.
우리는 가끔 잊곤 한다.
평범한 하루가 평온한 나날들이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가끔 착각하며 산다.
나의 아이의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만큼 오래 함께 해줄 거라고.
"엄마, 나 간다."
"응, 학교 잘 다녀와."라는 평범한 헤어짐에 또다시 만날 거라는 확신을 갖고 산다.
은희의 죽음으로 나는 언제나 헤어짐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산다. 아이에게 지각하겠다고 호통을 친 날에도 차에서 내리는 아이의 등에 대고 외친다.
"사랑해! 집에서 보자!"
집에서 보자는 말에 진심과 염원을 담는다.
언제나 헤어짐을 준비한다면,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은 나에게 허락된 가장 마지막 날이기에 더없이 귀해진다. 후회하기 전에 표현하고, 아이의 앞날에 걱정이 될 때면 당장 오늘 아이의 존재에 감사하기로 마음먹는다.
모든 책에서 외치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어떨 땐 너무나도 거창하게 들려서 어른이 되어도 가끔 묻는 사람들이 있다. 행복을 대체 어떻게 만드냐고.
언제나 헤어짐을 준비한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하다는 것을.
따뜻한 집에 아이들을 뉘일 수 있음에,
오늘 굶지 않을 수 있음에,
오늘 죽을 만큼 미워도 다시 새로운 날이 와줬기에
불행하지 않아서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