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년 만에 피다
베란다가 정글이 되어가는 가운데 구석에 방치해 고사하지 않게 물만 겨우 주었는데 꽃이 피었다.
저렇게 작은 꽃송이지만 향기 한 번 진하다.
향수를 방불케 할 만큼이나.
그래서 그 이름도 천리향인가 보다.
전일제 일하러 가는 게 전부인 나에게 이젠 화초 가꾸기도 버거워졌다.
애정 어린 손길로 다듬고 가꾸어줘야 하는데 겨우 물만 공급해 주니 제멋대로 자란 식물들이 귀신같다.
그래도 봄은 오는지 꽃대들이 하나둘씩 꽃을 보여주고 있다.
기특하고 장하다.
4년 전의 장미도 한 송이, 카랑코에와 제라늄은 가장 왕성하게 꽃대를 만들고 있다.
원 없이 마당 있는 집에서 정원을 가꾸어 보고 싶은 로망은 점점 사그라들고 있다.
뭐든 하고 싶은 욕망이 솟구칠 때 해야 한다.
여행도 공부도 쇼핑도.
벼루고 미루다 보면 그 욕망은 점점 줄어들면서 종내는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여행도 가슴이 떨릴 때 가야지 나중에는 다리가 후들거려 못 가게 된다.
나도 벌써 장거리 여행은 기피하기에 이르렀다.
동남아나 일본 정도로 좁혀졌다.
강추위의 휴일 아침 나는 기린선인장 화이트와 레드 가지를 몇 개 자른다.
출근하여 책상 화분에 모둠으로 꾸며줄 것이다.
연애 세포는 죽었지만 식집사 세포는 아직 살아 있어 다행이다.
살아줘서 고맙다.
꽃을 보여주니 더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