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아내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녀의 입장에서 보냈을 평범한 하루를 구성해 본 내용입니다)
#. 2026년 2월 24일
AM 6:30
오늘은 꽃 시장을 가야 해서 잠자리에서 일찍 일어납니다. 요거트와 그래놀라로 가볍게 아침을 먹으며 오늘, 내일 예약 건들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미리 계획해 둔 꽃 사입 리스트를 체크해 봅니다.
AM 7:40
이 시간에는 차가 많이 밀리지 않는데, 오늘따라 조금 밀리네요. 고속터미널 꽃 시장에 도착했습니다. 부지런히 시장을 돌아다닙니다. 흰색, 핑크색 꽃을 찾는 예약 건들 이 많아 그 색감들 위주로 꽃들을 사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시기에는 라넌큘러스, 튤립, 설유화 등을 볼 수 있는 계절입니다. 상태가 좋은 라넌큘러스를 찾아 부지런히 돌아다닙니다. 같은 꽃이라 하더라도 도매상점마다 꽃 상태와 가격이 다르므로 몇 군데만 들를 게 아니라 최소 한번 정도는 시장 한 바퀴를 돌면서 사입할 가게를 마음속에 정해둡니다. 결정이 끝나면 빠르게 사입을 시작합니다. 꽃이 생각보다 무거워, 사입량이 많은 날엔 들고 다니면서 구매할 수가 없어, 중앙 계단에 조금씩 꽃을 옮겨놓으면서 사입을 합니다. 도매시장 3층 중앙 계단은 공공연하게 간이창고로 이용되고는 합니다.
AM 9:00
사입한 꽃들을 실어 가게에 도착하니 아침 9시입니다. 꽃을 포장한 비닐과 신문지를 벗기고, 상품으로 만들기 좋은 상태로 컨디셔닝을 진행합니다. 컨디셔닝은 보통 꽃줄기 하단을 자르고, 상품 제작에 불 필요한 잎이나 가시를 정리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물이 잘 내리는 특정 꽃들의 경우 열처리를 진행하기도 하는데, 뜨거운 물에 꽃의 줄기를 잠시 넣었다가 빼면서 물이 올라가는 통로인 도관에 공기를 뺌으로써 물을 더 잘 흡수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컨디셔닝이 끝나면 컨디셔닝 과정 중에 생긴 쓰레기들을 빠르게 정리합니다.
AM 10:00
근처에 위클리 플라워를 진행하는 레스토랑이 있어, 레스토랑 영업 개시 전 화병 꽂이를 마무리해야 합니다. 꽃들과 여러 도구들을 챙겨 급히 출발합니다. 직원분들이 영업준비를 하며 반갑게 맞아주십니다. 계절감을 살리면서, 매주 다른 디자인으로 화병을 꾸민다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닙니다. 2년이 넘게 하고 있지만, 여전히 어려운 걸 보면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습니다. 커피를 챙겨주시는 직원 분과 짧은 인사 후, 지난주에 꽂았던 꽃들을 정리하여 업장을 나옵니다.
AM 11:00
가게로 다시 돌아와 오늘, 내일의 예약 주문 건들에 대한 작업을 시작합니다. 오늘 고객분들에게 나가는 꽃다발 상품은 많지 않으나, 내일 예약 건들 이 특정 시간에 몰려있는 상황입니다. 아무래도 설 연휴가 끝난 후 졸업식 행사가 많은 듯합니다. 졸업식 꽃다발은 여러모로 고객분들의 요구사항이 많은 편입니다. 인생에 몇 안 되는 특별한 순간이니, 그런 날을 좀 더 아름답게 기념하고자 하는 고객분들의 마음이 큰 탓일 겁니다.
메인이 되는 꽃과 그 색감에 어울리는 소재와 서브 꽃들을 고르고 조화가 잘 이루어지도록 디자인합니다. 꽃의 높낮이, 화형도 고려해야 하니 거울을 보면서 디자인을 조정해 나가고, 만들고자 하는 볼륨감이 나올 때까지 꽃을 쌓아갑니다. 최근 들어 왼쪽 손목과 손바닥 안쪽이 욱신 거리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아무래도 꽃을 만들 때 왼손으로 꽃다발 전체를 잡고, 오른손으로 한 송이씩 더해가는 방식으로 만들기 때문에 왼손에 무리가 많이 갑니다. 가게를 시작한 지 3년 정도 되니, 일종의 직업병도 생긴 것 같습니다.
PM 1:00
잠시 시간을 내어 집에서 싸 온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합니다. 예약 건들 이 몰리는 경우, 끼니를 거를 때도 많은데 오늘은 그래도 짬이 나 허기짐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가, 작은 행복이었던 점심시간을 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먹고 싶은 메뉴를 고르고 좋아하는 식당을 가는 그 평범한 일상의 행복이 사라진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가끔 시간이 많은 날에는 집에 잠깐 들러 집밥을 먹을 수 있으니 또 다른 행복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옆 카페 사장님과 이번 달 관리비와 두쫀쿠에 대해 잠깐 수다를 떨다가 짧은 점심시간을 마무리합니다.
PM 1:30
오전에 하던 작업을 이어서 진행합니다. 중간중간 오늘 오전에 들어온 예약 문의에도 늦지 않게 응대해야 합니다. 예약제 운영인 탓에 고객분들과 상담할 일이 많은데 특정 고객분과 상담이 길어지는 경우도 있어, 문의가 쌓이지 않도록 미리미리 네이버 채널이나 DM을 확인해 줍니다.
오후 3시 꽃다발 픽업 건 마무리를 위해, 미리 잡아놓은 꽃다발 초안의 수정 작업을 진행합니다. 시든 꽃은 없는지, 꽃이 뭉치지는 않았는지, 꽃 사이즈는 적당한 지 다시 한번 체크합니다. 문제가 없으면 포장을 시작합니다. 습자지와 두꺼운 화이트 컬러 종이 위에 꽃다발을 놓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지지 않도록 균형을 잘 맞추어 꽃을 감싸줍니다. 꽃을 가리지 않도록 종이를 정리해 주고, 아래 부분을 화이트 리본으로 잘 묶어줍니다. 꽃다발을 픽업하고 선물 받으신 분이 화병에 꽃을 넣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리므로, 꽃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물주머니 처리도 이어서 진행합니다. 이제 마지막 단계가 하나 남았는데, 바로 사진 찍기입니다. 요즘은 마케팅이 너무도 중요한 시대여서, 꽃 상품을 판매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되고, 레퍼런스를 남겨 이를 SNS 홍보에 활용해야 합니다. 여러 각도와 배치로 수십 장의 사진을 찍고 나서야 비로소 고객분을 맞이할 준비가 끝이 납니다.
PM 5:00
다음날 예약 주문 건들까지 어느 정도 미리 작업을 해놓아야, 조금 더 편하게 일처리를 해나갈 수 있습니다. 급작스러운 주문 건들 이 종종 있기 때문에, 스케줄에 여유 시간이 있어야 원활하게 대응 가능하기도 하고요.
얼추 작업을 마무리하고, 주변 청소를 시작합니다. 꽃을 만드는 과정에서 꽃 양만큼이나 쓰레기가 많이 나옵니다. 잎, 가지, 잘린 줄기부터 꽃잎들까지 생각보다 많은 양이어서, 바쁜 날에는 50L 쓰레기봉투가 3일이면 가득 차기도 합니다. 아직 남은 꽃들은 작업 전까지 최대한 좋은 상태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화병의 물을 새로 갈아줘야 합니다. 꽃의 줄기도 끝 부분을 조금 잘라서 물을 흡수하는 식물의 도관이 막히지 않도록 합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이제 드디어 퇴근입니다. 저녁 6시가 조금 넘었네요. 빨리 가서 저녁을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PM 9:00
저녁도 후다닥 해 먹고 쉬려 하니, 예약 문의가 와 있네요. 원래 상담 응대 시간은 저녁 6시까지이지만, 내일로 상담 응대를 미루게 되면 문의 건들이 계속 쌓이는 게 마음이 불편해 웬만하면 늦은 시간에도 응대를 하고는 합니다. 이번 상담은 특별한 날에 필요한 꽃인지라 고객분의 요구사항이 디테일한데, 명확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어 상담이 길어지네요. 상담 후 다음 날 꽃 시장에서 사입할 재료들을 미리 생각해 두고, 밤 11시 잠자리에 듭니다. 오늘도 하루가 길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하루였습니다.
모든 직업이 그렇듯, 겉보기에 평화로워 보이고 고상해 보이는 플로리스트란 직업도 여러 애로사항과 고충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만 봐서는 그 어떤 일도 판단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업’이 지닌 무게는 다 비슷하지 않을까요. 일상의 고단함, 사회의 냉정함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하루를 충실히 살아내야 하는 압박감이란 건 쉬이 익숙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생명으로 태어난 이상 '일'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맞는 일은 없습니다. 맞는다는 건, 일에서 얻는 물질적, 정신적 성취가 일 때문에 포기하는 시간, 스트레스 상황으로부터의 자유보다 크다는 것을 의미할 겁니다. 과거에는 잘 맞았으나, 지금은 맞지 않는 경우도 있겠죠.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분들이 당신들께 잘 맞는 그 일을 하고 있기를 혹은 언젠가 발견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