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후배가 선배의 답장을 기다립니다
곽아람 기자님. 안녕하세요.
모름지기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까마득한 후배로서 적어도 제 이름 석 자와 소속 언론사와 작디작고 소중한 제 연차를 먼저 말씀드려야 함을 너무도 잘 알지만, (저 역시 ‘다나까’ 체를 강요하는 언론사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사정상 제 필명인 사샤와 7년 차 인터넷 언론 소속 기자라는 사실만을 말씀드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기회가 된다면야 제 정체를 기자님께 낱낱이 공개하는 건 물론, 기자와 저자(작가 대신 기자님께서 쓰시는 표현이죠)의 삶과 세계에 대해 제가 품고 있는 얕고 깊은 고민들을 죄다 털어놓고 싶습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하고 잠드는 머리맡에 기자님의 신간 <구내식당: 눈물은 내려가고 숟가락은 올라가고>를 두고는 곧 조우하게 될 ‘그날’을 상상해보고 있습니다.
아! 그래서 먼저 말씀드릴 게, 신간 정말 잘 읽었습니다, 선배. (어차피 얼굴도 이름도 모르시는 후배는 제 마음대로 선배를 어물쩍 “선배”라고 부르며 웃고 있습니다) 회사 구내식당이라는 현장을 중심으로 이렇게 한 직업인의 이야기를 쉽고 재밌게 풀어내시다니요. 저는 첫 회사가 강원도에 있는 소규모 방송국이었는데요. 50명 남짓 직원을 겨우 수용할 수 있는 작은 구내식당이 있었습니다. 구내식당에 들어왔으니 그때부터는 밥 먹는 시간, 냉정하게는 기자가 아닌 시간이라고 믿고 싶었죠. 하지만 불과 1시간 뒤, 아니, 10분 뒤에도 종종 예측하지 못했던 사건 사고가 터져 숟가락을 들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가야 했던, 기자이면서도 기자가 아닌 내가 존재하는 구내식당이라는 공간의 감각이 떠올랐습니다.
선배. 제게 이 감각이란 무거운 것입니다. 구내식당이라는 공간, 기자인 나와 기자가 아닌 나의 공존, 기자이기에 가질 수 있었던 이런 특별한 시공간을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지 여부 등에 대한 감각이 그렇습니다. 네 선배, 이제 선배께 띄우는 제 편지의 야마(주제를 뜻하는 기자들의 말, 기자어입니다)를 단도직입적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저도 가벼워지고 싶습니다.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가벼워져야 할 것 같습니다. 선배의 에세이처럼요.
얼마 전까지 직업 에세이에 관한 수업을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제시하는 여러 주제를 두고 수업에 참여한 다양한 직업인들과 함께 각자의 직업적 삶이 담긴 에세이들을 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가장 부끄럽고 말하기 싫고 흑역사인 이야기에 화두가 있다.” 다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 나오는 이 문장들을 읊어주셨어요.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문제를 정면에서 곧이곧대로 파고들면 얘기는 불가피하게 무거워진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나비처럼 가벼워서 하늘하늘 자유롭다” 등이었습니다. 하루키의 표현대로 둔한, 무거운 “풋워크”(footwork)의 소유자는 ‘빼박’ 저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직업 에세이 수업 마지막 날, 선생님은 제게 선배 책을 추천하셨습니다. 기자로서 한때 천진했던 선배와 제 얼굴이 그려진 듯한 분홍색 표지의 <눈물은 내려가고 숟가락은 올라가고>가 제 손에 들어오게 된 경위입니다.
순식간에 선배 신간을 독파하고 또 다른 선배 책 <쓰는 직업>을 주문했습니다. 두 책을 읽으며 밑줄 친 문장들은 선배의 이야기였지만 제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선배처럼 “기사가 내가 쓸 수 있는 글의 전부가 아님”을 깨달은 지 몇 해 되지 않았습니다. “회사가 제게 맡긴 역할에 갇히지 않고 나 자신은 내가 주체적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것도 올해 들어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저 역시 “도덕적 자신감”으로 고단한 기자 생활을 버티고 있고요. “그냥 회사원인데 직업이 기자일 뿐”이라는 마음으로 내일도 출근할 예정입니다. “불안에 떠는 재투성이 직장인”인 저는 “기동력이라고는 예나 지금이나 1도 없이 엉덩이가 무거워” 7년 차 기자가 된 현재, 스스로를 “회사 부적응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제가 요즘 브런치에 연재 중인 매거진 이름은 <나는 기자가 참 안 맞다>입니다.
“너, 이상하지 않아. 이런 기자도 있고 저런 기자도 있는 거야. 각자 서로 다른 가치가 있고, 다 필요해.” 책에서 선배가 제게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한없이 무거워지지 않은 채 가벼운 풋워크로 쓴, 야마를 해치지 않는 적정 수준의 재치까지 곁들인 선배만의 글이 저를 위로했습니다. 책 <쓰는 직업>에서 선배는 “애이불비하려 노력했다”라고 하셨는데 이 글들이 그 결과물인 걸까요. 기자인 선배, 저자인 선배 전부 닮고 싶어 졌습니다. 제가 “지금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은 바로 선배입니다.
기자인 제가 현실에서 직면하는 난관과 고민들, 저자라는 새로운 꿈을 향한 갈망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저는 무거워집니다. 이 이야기들을 글로 풀어내다 보면 제 마음속 깊은 곳까지 다다르게 되고, 타고난 성정 자체가 단순하지 않은 탓인지 종국에는 우울과 불안, 평정심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찬 ‘똥글’이 생산되고 있다고 느낍니다. 제가 3개월 전부터 브런치에 일주일에 글을 2개씩 올리고 있는데요. 이번 주에 글 한편을 올리지 못한 이유입니다. (일요일 자체 마감은 지킨다는 원칙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고, 선배께 굳이 말씀드리고 싶네요) 직업 에세이 수업을 마무리하고, 또 선배 책들을 읽으면서 앞으로 어떤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해졌기 때문입니다.
고로 선배께 괜히 책임을 떠넘기고 싶은(?) 마음에 이런 편지를 쓰게 됐습니다. 선배 글 때문에 제가 혼돈과 좌절의 늪으로 빠지기 직전이니, 더 늦기 전에 선배가 절 구해야 한다(?)는 억지 논리입니다. 선배, 저는 사실 무거운 글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확실히 제가 쓴 글인데도 무겁게 쓰인 글은 저조차 다시 읽기가 힘들더라고요. 하물며 독자들은 얼마나 더 이 글이 무거울까, 에세이를 선택하기 앞서 독자는 무거움보다는 가벼움을 얻어가려고 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저, 가벼워져보고 싶습니다. 가벼워진다는 건 어떤 것인가요, 선배. 그 자체로 막막하고도 막연한 질문을 던졌으니 어떤 대답을 주셔도 기쁠 것 같습니다. 조리 있게 말씀드리지는 못했지만 저, 마음만큼은 진심으로 간절합니다. 가벼우면서도 내 색깔이 담긴, 독자들이 “맞아 맞아”하며 공감하고 통찰까지 얻을 수 있는 글을 쓰길 바라지만 그것은 선배니까 가능하신 게 아닌가 싶…. 선배와 다른 글, 읽히는 글을 쓸 수 있을지도 자신은 없….
주절주절 한탄으로 편지가 길어져 죄송합니다, 선배. 선배도 내일 출근하셔야 하는데 이렇게 스트레스를 드리면 안 되겠죠. (저는 선배의 그저 골치 아픈 후배가 되고 싶지 않으니까요) 저 혼자 선배와 저의 거리를 아주 지근거리로 여기며, 흡사 사무실 옆 자리 선배라고 상정하고 편지를 써 내려간 것 같습니다. (지근거리가 되고 싶습니다, 선배) 선배께서 답장을 주실리 만무하지만 저는 선배의 어떤 메시지라도 끝내 기다려보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꼭 드리고 싶은 말은요. 선배. 기사가 아닌 글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지의 후배가 기사 쓸 힘, 에세이 쓸 힘 모두를 선배 글에서 얻어갑니다. 언젠가 꼭 뵙겠습니다.
얼굴도 이름도 (지금은) 아실 수 없는 미지의 후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