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나의 심연

#2. 글쓰기 모임

제목은 현실 자각 타임

by 사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그것도 전 직장, 심지어 전전(前前) 직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게다가 그 직장들에서 가졌던 직업을 기어코 때려치운 이 시점에, 굳이, 나는 왜 누구나 내 글을 볼 수 있는 온라인 공간 ‘브런치’에까지 글을 쓰고 있나? 제대로 현타, 이름하야 현실 자각 타임이 왔다.


동네 요가원에서 80분짜리 요가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는 밤길.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옆에서 아주 멀쩡하게 걷는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 나 현타가 계속 와. 나 왜 글 쓰지? 첫 직장부터 해서 이직한 회사도 그만둔 마당에 그때 얘기들을 글로 써서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이 똥글들을 모르는 사람들한테 전부 보여주기로 했던 것도 조금은 후회가 돼. 브런치고 글이고 다 관둬버릴까?


가만 듣고 있던 남편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글을 써야 하는 이유가 있어. 내가 말했다. 그게 뭔데? 그가 답했다.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지니까. 아무도 모르게 되니까. 당신 그 선배 알지? (남편과 나는 전전 직장 동기 사이다.) 어느 날 돌아보니 본인이 3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했는데 남는 게 없는 것 같다더라. 본인만의 직장 생활이었을 텐데 그 선배는 기록하지 않았잖아. 글로 남기지 않았잖아. 당신은 다르지. 당신만의 이야기를 글로 기록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당신의 지난 7년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일리 있는 말이군. 우선은 내일도 써보기로 했다.


그럼 이제 현타가 안 오느냐? 아니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현타를 부르는 이 문장의 본질은 다음과 같다. 나, 뭐 하고 있나? 이 물음표 살인마는 ‘왜 글 쓰지?’를 비롯한 여러 물음표를 낳는다. 나, 왜 요가하지? 왜 책 읽지? 왜 공부하지? 결국에는 여기까지 간다. 나, 왜 살지? 극단적으로 비치는 이 질문을 순화해보면 이렇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토록 열심히 살고 있는 걸까? (끊임없이 뭔가를 계속하는 정도의 열심이다.) 지금의 삶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 건가? 이 지점에서 한 가지 당황스러운 사실은, 진정 열심히 살았던 (숨 가쁠 정도의 열심이다.) 과거에는 이 질문들 중 단 하나도 내 머릿속을 살랑이며 스치고 지나간 적조차 없다는 것.


모두가 예상하다시피 이 질문들의 답은 나오지 않았다. 고로 현타는 계속된다. 현타는 현실을 자각하게 해주는 시간이지만, 지나치게 현타가 반복되다 보면 되려 현실이란 게 무엇인지 당최 모르겠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러자 나는 그제 카페에서 노트를 펴고 말았다. 10대 여성들이 서로를 씨발년아, 미친년아 하는 소리를 들으며. 그리고 이른바 현타 문장들을 당장 떠오르는 대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펜으로 적어 봤다.


왜 글 써? 왜 회사 안 다녀? 왜 돈 안 벌어? 왜 책 읽어?


우선 이렇게 네 문장. 이 문장으로부터 화살표를 하나씩 빼내 그려가며 나 스스로 답을 해봤다. 공포 그 자체였던 카페에서 써 내려간 자문자답의 내용을 옮겨본다.


왜 글 써? → 기록 차. (남편이 알려준 답.) 마음 챙김을 위해. 출간 작가라는 먼 꿈 때문에. 내 (똥) 글을 (감사하게도) 읽어 주시는 20여 명의 누군가가 계셔서. 할 일이 딱히 없어서. 긍정적인 활동이라고 믿어서. 차분해져서. 재밌어서.


왜 회사 안 다녀? → 전 직장을 더 못 다니겠어서. 그만둔 뒤로 아직 취직 못(안) 해서. 더 재밌는 회사 다니려고 준비 중이라서.


왜 돈 안 벌어? → 뭘로 돈 벌지 아직 못 정해서. 급하게 돈 벌 곳 정하지 않으려고. 돈 없어도 생활이 가능해서. (남편 님 고맙다.)


왜 책 읽어? → 그동안 못 읽어서. 책 읽는 게 나를 바꿔줄 수 있나 해서.


만년필 노트의 일부


그렇군. 생각의 뭉게구름 사이를 떠다니던 글자들을 직접 적어 보니 납득이 된다. 그래, 이런 이유로 내가 이런 것들을 하고 있지. 그런데 반대급부를 따져보니, 참 그게 그렇다. 직장 생활하며 글은커녕 문장 하나 쓰지 않았던 시절에는 (불과 두 달 전이다.) 나 왜 글 안 쓰지, 왜 책 안 읽지, 왜 돈 벌지 따위의 질문이 나를 지배한다거나 현타를 부르지도 않았었는데…. 오히려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진짜 질문들을 이제야 하기 시작한 건가? 어쩌면 나, 성장한 걸지도…? 결론이 이에 다다르자 지난달 전남 구례에서 만난 타로 마스터가 내뱉은 한 마디까지 툭 튀어나온다. “혹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달려오기만 했나요?” 그의 말에 물음표만 남았었는데 드디어 느낌표가 찍힌다. (결국 타로점이 이미 다 가르쳐준 진실이었던가. 착각이겠지.)


현타가 곧 내면의 성장을 뜻하는 지표로 인식되면서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더 나아가 현타가 진작 왔어야 했다며 다행이다, 라고 되뇌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고로 현타는 계속된다. 자문자답은 이어진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음…. 머뭇거린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 또 의미 없는 감탄사만 낸다.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다들 그렇지 않을까? 애초에 예측이 불가한 인생사, 지금 여기 내가 있는 곳을 통찰할 수 있는 이가 설마 많기야 하겠으며,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는 뚜렷한 이유를 갖고 순간순간 숨을 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다만 현타가 아예 없는 삶보다야 이 삶이 낫다고 위안 삼으며, 오늘도 나는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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