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가벼운 나의 심연

다 내려놓기로 했다

by 사샤

#2026년 3월 13일 오후 1시 8분


오늘 아침 역시 불안에 떨면서 한동안 보냈는데, 밖에 나오니 햇살은 이런 내 마음도 모르는지 눈부시게 눈부시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두둥실, 바닥으로 쿵 가라앉아있던 마음이 하늘로 떠오른다. 좋다. 편안하다. 고개를 젖혀 햇살을 바라보며, 눈도 살짝 감은 채로 슬렁슬렁 걸었다. 점심 먹고 산책 겸 카페에 가는 길. 동네 스타벅스에 도착해 오랜만에 뜨거운 유자 민트 티를 시켰다. 이것도 임신 증상인 건지 (요즘 나는 뭐 하나 평소 같지 않은 생각이나 행동을 할 때면 ‘임신 증상인가’ 의심하는 버릇이 생겼다.) 커피가 먹기 싫다. 뱃속 아가를 생각해 디카페인을 마시는데, 이마저도 커피 맛은 혀에 대기도 싫다. 그렇게 먹게 된 유자 민트 티는 은은하게 달콤하고 속을 따뜻하게 어루만진다. 맛있다.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했다. 지난 월요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부터 극도의 불안감이 밀려와 더는 안 되겠다 싶어 급하게 심리 상담을 갔다 왔다. 남편과 함께 부부 상담을 받으러 다녔던 곳이라, 상담 선생님께서 나를 비교적 잘 아신다. 나에 대해 알려드릴 시간을 단축할 수 있기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는 친숙한 선생님을 찾았다. 이날 상담의 핵심은 컨디션이 예전 같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 평소의 60%는 될까 싶은, 아니 절반도 안 되는 날이 부지기수인 요즘(끊임없이 더부룩한 속, 수시로 쏟아지는 졸음과 피로, 널뛰는 감정 기복….), 냉정하게 말해 취업을 비롯한 ‘빡센’ 도전은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모든 에너지를 총동원해 수개월을, 수년을 매달려도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취업 아니었던가. 기자가 되기 전 20대 백수 시절, 3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며 일찍이 알았던 바 아니었나. 아무렴, 이제는 경력직이 돼서 ‘무경력 신입 취업’ 때보다야 취업이 쉬워졌다고 한들, 되려 퇴사 후 공백을 거쳐 경력 이직을 도모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님을 절실히 깨닫고 있다. 하물며 100 중 30, 40의 에너지로 이직 준비를? 이 작은 에너지로는 이직 준비는 물론 임신 중 건강 관리까지 놓칠 수도 있다는 선생님의 조언이 날카롭게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그래, 그러면 다 내려놓자, 다짐하며 알게 된 놀라운 사실. 출판사 취업 준비가 생각보다 쉽게 내려놓아졌다는 것. 이 길밖에 답이 없다고 여기며 자기소개서를 쓰고, 되돌아오지 않는 면접 연락에 좌절하고 했던 시간이 민망하리만큼 툭, 내려놔졌다. 출판 마케터라는 새로운 꿈이 내게 겨우 이 정도 무게였던가. 참, 나라는 인간을 나는 알 수가 없다. 정말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기자를 해볼까, 조심스럽게 꿈꾸는 나는 남들이 그동안 줄기차게 말해온 것처럼, 말도 안 되게도 기자가 천직인 걸까. 기자 생활을 돌아보는 게 힘들어 이를 주제로 한 브런치 북 연재도 계속 손에서 놓고 있는데, 다시 시작해야 하나 싶은 마음도 스리슬쩍 떠오르고 있다. (조만간은 아닐 것 같지만 말이다.)


속이 답답해져 문득 카페 창밖을 바라본다. 아, 그냥 단순해져야겠다.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 근원과 본질이 무엇인지 파고, 파고, 파고드는 일체의 행위를 중단할까 한다. 문득 이거하고 싶은 것 같다, 원하는 것 같다는 가벼운 직감 하나하나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는 게 맞지 않나 싶다. 무겁게 파고들지 않고 가볍게 떠오르고 싶다. 아까 카페에 들어오기 전, 햇살과 함께할 때처럼.


그저 감사하다. 이번 주 평일 중에 컨디션이 좋은 편이라서 감사하다. 지난 월요일, 화요일에는 오전에 요가 수업을 예약해 놓고도 못 갔다. 도저히 요가원에 가서 몸을 움직일 힘이 없었다. 자다가 일어났을 뿐인데, 기진맥진하고 온몸에서 땀이 났다. 그런데 다행히 그다음 날인 수요일에는 힘이 조금 있어 오전에 요가를 다녀왔고 목요일에도 오전 치과 일정을 무사히 소화해 냈다. 오늘은 어젯밤 잠을 설친 탓에 오전에 집에서 뒹굴거렸더니 에너지가 약간 차올라 햇살 산책도 하고 카페에도 왔다. 브런치에 글을 쓸 정도의 집중력도 생긴다. 이 정도의 집중력에도 너무나 감사해 눈물이 날 지경이다. 머릿속이 뿌옇기 일쑤였는데 너무나 감사하다. 거창한 것을 바라지 않는다. 감사하다.


내일은 2주 만에 병원에 간다. 내일 초음파를 하면서 의사 선생님이 우리 아가의 우렁찬 심장 소리를 들려주시겠지. 설렌다. 저녁에는 아빠 생신 파티도 있다. 이토록 귀한 일상에 더 감사함을 가져야지. 우리 아가의 태명은 오로라다. 줄여서 로라라고 부른다. 임신 전부터 남편과 아이슬란드 여행을 가려고 준비했었는데, 임신으로 여행이 무산돼 오로라를 못 보게 됐던 상황. 대신 내 뱃속에 오로라가 나타났다. 로라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내가 더 행복해져야지. 로라가 내 기분과 감정을 다 느낀다고 하니까. 로라를 만나려고 노력했던 시간들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로라와 함께 찾아온 지금의 힘듦에 너무 잠식되지 않도록, 내게 허락된 에너지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보려고 한다. 무리하지 않고 낮잠도 속 편하게 자고, 금세 지치더라도 멈출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지. 나와 로라는 다 할 수 있다. 다 잘할 수 있다. 다 괜찮다. 더 용감해지자.


KakaoTalk_20260313_134637555.jpg 남편과 한강 산책을 하며 만난 스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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