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쓰인 글은 읽는 순간 현재가 되며 미래의 지식이 된다.
학부생 강의를 할 때 가장 흥미로운 것은 간간히 새어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강의실이 아니라면 마주치기 힘든 삶의 단면들이다. 나는 학부로 사립 예대를 졸업했는데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인종과 지역 출신을 불문하고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 등록금과 토플 성적, 대도시의 위치성이 만들어낸 일관성이었다.
첫 수업을 마무리하자 지각을 한 학생이 와서 늦은 이유를 (묻지도 않았는데) 설명했다. 오는 길에 누군가 머리에 총을 맞는 사고 현장을 맞닥뜨려서 늦었다고 했다. 그는 내가 그의 지각 때문에 화가 났을 거라고 예상을 했는지 다소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괜찮냐고 묻자, 그가 대답했다.
"전 괜찮아요. 총을 맞은 건 제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었어요."
그게 아니고, 총을 맞은 걸 목격한 것 괜찮냐고, 내가 묻자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I guess." 하며 말을 흐렸다. 이런 질문을 한 게 내가 처음이구나.
어느 날은 성공과 실패의 경험이 자아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강의하다가 학생들에게 각자의 성공을 말해보자고 했다. 그때 늘 조용하던 학생이 어깨 높이까지 손을 들어 올렸다. "I make a story." 그는 작가가 꿈이었다.
같이 일하는 동료는 이야기의 본론만 새겨듣고 양식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태도를 취했다. 같은 교수와 함께 협업을 하는 입장에서 그가 어떻게 교수의 무례한 표현과 행동에 반응하지 않고 일 처리를 하는지 궁금했다. 그와 달리 나는 매번 평정심을 잃고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다. 너는 어떻게 요지만 쏙 빼먹고 그렇게 털어버릴 수가 있어?
그가 나지막이 입을 떼며 말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주변에서 시비를 많이 걸었어. 학교에서 걷다가 누군가가 뒤에서 발로 찬다거나 하는 식이었지. 집에서도 틈만 나면 아버지가 시비를 걸었고, 그런 일에 일일이 반응을 하면 살 수가 없어서, 그러다 보니 그렇게 된 거야.
와, 너는 삶이 레몬을 건넸더니, 레몬 왕국을 건설했구나. 그에게 말하자 그가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아픈 이야기들이 아픈 사람을 만들진 않는다.
박사논문 계획서의 초안을 보여주자 지도교수가 말했다. 이건 연구가 아니라 자료를 찾는 거잖아.
협업하는 시민 단체에게 도움이 되는 박사논문을 쓰고 싶었다. 그들이 주로 원하는 것은 정보였다. 그리고 그런 정보들은 컴퓨터 앞에 몇 시간 앉아 정부의 웹사이트나 서류들을 열람해보면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들은 집회를 하고 정치인들의 대변인과 만나는 등 사회운동을 하느라 늘 분주해서 그럴 시간이 없었다. 지난 2년간 나의 역할은 그런 자료들을 찾아서 정리해주는 일이었다. 정보가 원료라면 지식은 가공품이다. 아무도 정보를 비판하지는 않는다. 사실 도움은 고사하고, 나의 필터링을 거쳐 생산된 지식들이 그들의 사회운동을 왜곡할까 봐 불안했다.
그러다 최근에 결국 연구라는 것은 결국 이야기를 모으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질적 연구 (qualitative research)를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의 연구 대상인 단체는 코로나 사태가 퍼지기 시작한 시점에 생겨났다. 그들은 대부분 동네 주민으로 한 명의 스태프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원봉사자들이다. 그들은 세계적으로 땅값이 비싼 뉴욕시에서 정부 소유의 공터들의 개발권을 민간 기업이 아닌 주변 공동체에게 넘길 것을 주장하고 있다. 아마 내가 졸업을 하고 한참 후에도 그들은 '수치화'된 성과를 내기 어려울 것이다.
지난 2년간 그들의 이야기는 차곡히 모였다. 그들이 세금이 밀려 집이 압류 위기에 처한 동네 이웃들에게 전화를 걸어, 노크를 해서, 전단지를 돌려서 압류를 막은 것을 봤다. 그들의 사회운동에 영감을 받아 자신들의 동네에 가서 같은 목적의 단체를 만들고 주말마다 공터 앞에서 공동체가 원하는 공터의 재개발 모습에 대해 설문조사를 하는 것을 봤다. 설문조사를 도우면서 집이나 건물을 가지고 있는 주민들이 재개발이라는 것이 꼭 누군가를 내쫓는 모습으로 일어날 필요는 없다, 는 것을 깨닫는 모습도 봤다. 그리고 건물이나 집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땅값이 오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 그들 또한 이웃이 쫓겨나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도 배웠다.
이야기를 모으고 있다고 생각하니, 번쩍은 아니어도 어깨 높이까지 손을 들어 올릴 만큼의 자신감이 솟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