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치 Jun 03. 2022

별다른 기억

책은 펼쳤을 때 왼손과 오른손에 닿는 무게감의 차이가 남은 이야기를 가늠시켜 준다. 


학생일 때 1년에 한 번 반이 바뀌는 것이 헤어짐을 연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내가 해외에 있을 때 할아버지와 외삼촌이 돌아가셨다. 명절 때나 잠깐 봤던 것 외에 별다른 기억이 없었기에 눈물이 나진 않았다. 잘 알지 못하는 같은 반 친구가 전학을 간 그런 느낌이었다. 


돌이켜보면 성인이 되고서 마지막임을 알고 헤어진 사람들은 거의 없다. 관계의 끝은 관계 전체의 기억에 언제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어릴 적 외할머니는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을 만큼 멋진 분이셨다. 유행을 타기 전에 청바지를 입으셨고, 어린이들이 좋아할 만한 요리를 할 줄 아셨다. 엄마나 이모들과는 사이가 썩 좋지 않으셨는데, 엄마가 외할머니와 통화를 끊고 나면, 나는 왜 할머니에게 말을 그렇게 하냐고 다그쳤다. 


성인이 되고서야 외할머니가 엄마의 친엄마가 아님을 알았다. 엄마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외할머니는 좋은 엄마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그 사실들을 알게 된 것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할머니의 소식이 끊긴 후였다. 할머니는 내가 사랑하는 엄마를 아프게 했고, 나에게는 좋은 추억만 남겨주셨다. 


한국에서 1년 넘게 지내다 보니 동네에서 매일 마주치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목발을 싣고 전동휠체어를 타셨는데 어느 지점에서부터 전동휠체어를 세우시고 버스 정거장으로 두 정거장 정도 되는 거리를 한나절 동안 목발을 짚고 왕복으로 걸으셨다. 


처음에는 할아버지가 '이동'중이라고 생각했는데, 매일 마주치자 그것이 '일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할아버지가 이동하는 길은 버스 두 정거장과 대기업 건물이 자리해서 유동인구가 많고 신호등이 많아 혼잡했다. 조금 더 가면 공원이 있는데, 왜 번잡한 거리를 목발을 짚고 왕복을 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매일 마주치다 보니 아는 사람 같았고, 할아버지 주변 풍경이 보였다. 나무 한 그루 없어 아스팔트 열기가 그대로 올라오는 구간이 보였고 차도와 가까워지면서 좁아지는 인도가 신경 쓰였다. 마음이 어수선하거나 심란한 날 어김없이 마주치는 할아버지는 내게 귀한 익숙함이었다. 


한결같기를 바라거나 꾸준함을 칭찬하는 것과는 다른 마음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성과를 기대하기 않기를 어떤 일들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를. 


사람 말고 시간을 기억하기로 했다. 관계의 끝과 상관없이 아무도 나쁘거나 좋은 사람일 필요가 없었다. 

작가의 이전글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 인간이 되기로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