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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치 Apr 24. 2022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 인간이 되기로 했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은 소위 말하는 '호구 짓'이었다. 그런데 나는 손해 보는 장사, 보다 장사를 하며 살고 싶지가 않다. 


투표는 이기고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지만, 이기기 위한 선거만 한다면 우리는 평생 이기고 지는 방식으로 의사를 결정할 것이다. 


지난 대선 때 1,2번 후보의 투표 격차를 두고 3번의 개표수에 분노를 표출하는 이들을 온라인으로 종종 봤다. 내가 지지하는 당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후보자에도 등록되지 않았고, 후보로 등록된 이후에도 그들을 뽑은 적이 없었다.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는 마음으로 선거를 치렀다. 지난 서울시장선거를 기점으로 내가 지지하는 당을 투표하기 시작했다. 내가 찍은 후보를 얘기하자, 누군가 왜 '버리는 표'를 찍었냐고 했다. 지난 미국 대선 때는 한국에 살고 있어서 우표로 투표를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개표 전까지 도착을 보장할 수 없다고 해서 거금을 내고 빠른 배송을 했다. 지인은 뉴욕은 어차피 민주당 주인데, 왜 그렇게까지 투표를 하냐고 했다. 


며칠 전 내가 강의하는 수업의 과제 제출 마감일이었다. 지난 몇 년간 그래 왔듯 당일에 마감일을 연장해 줄 수 있냐는 각자의 사정이 이메일함에 쌓여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의 사정이 '사정'인지 몰랐다. 이것이 첫 대학 강의를 마친 후 느낀 점이었다. 최종 성적을 마감하고서야 몇몇 학생이 뒤늦게 과제를 제출하면서 피치 못할 사정을 얘기했다. 정작 사정을 얘기하는 학생들은 사정이 있는 학생들 중에서도 일부였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응급실에서 처음 근무 시작했는데 자신이 맡은 환자가 사망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학생은 뒤늦게 완성한 과제를 이메일에 첨부하면서 그 이야기를 했다. 과제를 완성하기 전에 말했더라면 어떻게든 상황을 맞춰줬을 텐데 그는 최소한 완성한 과제를 가지고 부탁을 해야 발언권이 주어진다고 생각한 듯했다. 


온라인 수업에 참석하지 못한 학생이 부모님이 써주신 '사유서'같은 것을 제출한 적이 있었다. 거기엔 내 강의 시간이 동생의 학교 온라인 수업시간과 겹쳤는데, 인터넷 연결이 불안정해서 동시에 청강하지 못하고 동생에게 양보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나를 두고두고 앓게 했다. 그 이후 학생들에게 내 역할은, 

그들의 성적에 미치는 일들에 대한 진위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들이 성적에 미치는 것을 감안하는 것이라고 늘 강조하고 다닌다. 일을 늘리고 정신건강을 챙겼다. 


뉴욕시에서는 community board의 지원하에 시민단체가 재개발계획을 제안할 수 있다. 법안이 만들어진 후 30년간 12건의 계획이 (주로 부유한 동네를 더 부유하게 만들기 위한 건안들이) 통과되었다. 참여형 개발을 지지한다는 취지의 그 법은 뭐랄까, 민주주의의 구색을 맞추기 위한 겉치레 같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지난 몇 년간 시민 단체는 비영리 개발자와 건축가의 도움을 받아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 재개발 계획을 세우고 꾸준히 지원해왔다. 


1년 전부터 협업하는 단체는 재계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 무렵 교수에게 그들의 계획을 돕는 일이 모래성을 쌓는 심정이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교수가 말했다. 그 계획은 시행 여부에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니야. 그 계획을 세우면서 생기는 관계와 연대, 계획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정부가 다른 계획을 제안할 여지를 줄이는 것, 시민들에게 대안책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는 것에도 의미가 있어. 후로 1년이 지난 지금, 노숙인들이 직접 토지 조사를 하고 세운 계획이 10년간의 사회운동 끝에 올해 통과되었다. 1990년대 이후로 처음이었다.  


지지하는 당을 투표하기 시작한 계기는 실제로 내가 지지하는 당을 투표하고 온 지인이 한 말이었다. 누구 찍었어? 왜? 찍고 싶어서. 찍고 싶은 사람 찍는 게 투표지 참. 


늘 지지하는 당이 지는 싸움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10년간 그들의 승리를 알아보는 데에 내가 실패했다. 지는 것과 부정당하는 것은 매번 실망스럽다. 목적중심적으로,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사는 사람들을 상종하기 싫은 것과 별개로 상처를 덜 받고 사는 것 같아서 부러웠다. 그렇게 살아보려고 간간히 애를 쓴 적도 있으나 막상 목적은 중심이 될 수가 없었다. 과정에서 배운 새로운 정보들이 목적을 재구성했다. 목적성보다는 잘 구축된 방향성이 상처를 막아주진 못해도 의미 있게 만들었다. 


사회운동에 관한 자료조사를 하다 보면 비판만큼 쉽고, 쉽게 인정을 받는 것도 없다. 야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숙을 경험한 시민 단체들이 10년에 걸쳐 통과시킨 계획은 9년 전에 실패하고 올해 성공한 프로젝트이다. 성패는 마감일이 가르는 건가? 애초에 이기거나 질 수밖에 없는 판을 세운 이들이 정한 마감일을 왜 따라야 하지? 세상에는 이겨야 할 싸움이 너무 많고 당연히 계속 싸워나가야 한다. 호구가 체질이라 그런지 정신 승리는 타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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