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업의 함정은 어떤 것을 이해하면 바뀔 것이라는 오만이다.
협업하는 단체는 매주마다 전략회의를 가진다. 전략회의에서는 정책 추진과 홍보사항에 대해서 의논한다. 어떤 정치인을 어떤 식으로 압박을 할 것인지, 현재 추진하는 캠페인을 홍보하기 위해서 어떤 행사를 기획하고 누구를 초청할지, 어떤 단체와 동맹을 맺는 것이 유리할지 등등을 이야기한다. 거기서 나는 대부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쪽(?)으로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이를 테면 누군가는, 특정 정치인이 곧 은퇴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기고 싶어 할 것이고, 그 점을 공략해서 지지를 얻어내자는 의견을 냈다.
문득 내가 이 회의에 참여자가 아닌 관찰자로 앉아 있다고 느꼈다.
최근 동료의 연구주제에 관해 듣다가 감탄했다. "네가 그것을 발견 (find) 하면 너무 멋진 연구가 나올 거야." 그러자 동료가 정색하고 말했다. "지식은 발견하는 게 아니고, 만드는 거야."
지식을 발견한다는 것은 발견 이전의 그 지식이 있었음을 가정한다. 따라서 연구자의 역할은 '발견'이고 발견과 동시에 어떤 현상을 순리대로 보이게 한다. 그렇다면 연구는 '순리'에 가까워지는 경쟁처럼 돼버린다. 세상의 이치를 가정하고 도달하려는 태도는 그 이치를 결정하는 가치판단이 아닌 그 이치와의 거리감을 논점으로 만들어버린다.
최근 뉴욕시에서 재산세를 미납한 가구들의 집을 압류하는 정책을 개정하기 위한 회의에 들어갔다. 밀린 재산세는 $1000 내외로 그것을 갚을 여력이 되지 않는 소위 말하는 house poor가 대부분이다. 이 가구들은 대부분 몇십 년 전에 뉴욕시의 부동산이 지금과 같은 호황을 누리지 않을 때 뉴욕시 내에서도 집값이 가장 낮은 동네에 위치한 집들이다. 내가 협업하는 단체는 미납된 세금을 비영리재단에서 갚아주고 그 집들을 사기업에 넘기는 대신에 비영리재단이 관리해서 압류를 막는 대안을 협상하고 있다. 지난 몇십 년간 이 정책으로 인해 사기업들은 재산세가 미납된 집들을 압류해서 재 공사한 뒤에 다시 되파는 식으로 큰 이윤을 남겼다. 뉴욕 시정부의 대변인으로 나온 공무원은 대안책을 검토하면서 재산세를 미납한 가구 중에서 총 몇 퍼센트의 가구를 압류 대상에서 제외시키고자 하는지를 되물었다. 단체 사람 중 한 명이 100%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가구의 크기와 미납금의 액수와 상관없이 아무도 강제로 퇴거를 당하지 않는 게 목표입니다."
얼핏 그들의 대안책이 이상적이고 '좋은 일'을 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상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은 별개다. (같았으면 한 단어로 쓰였겠지.) 당장에 $1000 내외의 액수를 미납해서 압류를 당한 가구들은 노숙 인구가 될 위험이 매우 크다. 압류된 집들이 사기업에 넘어가서 집값을 올리면 그 집들이 위치한 동네에 살고 있던 월세의 시세가 올라갈 것이고, 그 때문에 어떤 가구들은 강제로 이사를 가야 할 것이다. 뉴욕시는 거둬들이고자 하는 재산세에 비해 장기적으로 주거취약계층의 복지를 위해 더 많은 예산이 필요해질 것이다. 대안책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우리가 보는 현실과 그들 (정부와 사기업)이 보는 현실의 간극을 좁히는 것은 치우친 도덕적 판단도 아니고 이상(ideal)도 아니다.
학부생일 때 기숙사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 여름방학 동안 대학교를 방문겸 수업을 들으러 오는 청소년들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학생들이 기숙사에 머물렀다. 유년시절 나는 최악의 어린이였고 최악의 10대였다. 다행히 나는 내 악행들을 생생히 기억했고 나보다 더한 어린이나 청소년들 아직까지 본 일이 없어서인지 자연스레 그들을 대할 때 마음이 느슨해졌다.
어느 날 상사는 정신과 병력이 있는 학생이 있으니 그 학생의 상태를 확인해보라고 시켰다. 그 당시 같이 일을 하던 동료들은 대부분 대학교 1, 2학년을 마친 학생들로 그들이 감독하는 기숙사생들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그들은 기숙사생들을 엄격하게 대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그들과 구분 지으려 했다.
나와 동료는 그 학생이 지내는 방을 노크했다. 방을 열고 나온 학생은 입꼬리만 겨우 올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불 꺼진 방의 창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입주를 한 지 꽤 지났음에도 살림의 흔적이 별로 없어 보였다. 동료는 우리가 무슨 이유로 왔는지 그 학생에게 설명했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학생을 살폈는데, 팔이 생채기로 덮여있었고, 동료와 얘기를 하는 중에도 팔을 계속 긁고 있었다.
학생은 차분한 목소리로 본인은 괜찮다고 했다.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우리는 금방 대화를 마쳤다. 방을 나와서 내가 동료에게 물었다. 너 걔 팔 봤어? 동료는 못 봤다고 말했다. 내가 본 것에 대해 얘기하자, 동료는 자기가 다시 가서 얘기를 해보겠다고 했다. 무언가 증명하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만약에 그가 그 학생에게 정말 집중했더라면 그 상처들을 못 보고 지나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러라고 했다. 어긋난 적극성을 말리는 게 귀찮았던 것일까. 사실은 내가 본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었던 것 같다. 다음 날 그 학생은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고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이해한 바를 책임지는 것까지도 공부의 일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