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과학
난 23살의 대학생이다. 정확히 말하면, 군대를 제대하고 이제 복학한 지 1년이 다되어가는 복학생이다.
군 시절에 복학하게 되면 부모님께 항상 감사의 표현도 자주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장학금으로 학교를 마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살아온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만들어진 나의 습성을 군 시절 20여 개월 만에 고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란 것을 깨닫게 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나의 이런 정신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지하 원룸의 모습이다. 지하방이라 형광등을 켜놓지 않으면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캄캄하다. 빛이 들어 오는 작은 창문 하나 없는 곳이다. 현관문 오른쪽에 작은 싱크대가 있고, 위에 그대로 놓여있는 냄비와 그릇들이 보인다. 언제 사용했는지도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것 같다. 밥솥 안에는 오래된 밥이 그대로 굳어져 곰팡이 냄새도 난다. 빨래를 자주 안 해서인지 쉰내가 방안에 가득하며, 지금 입고 있는 이 옷도 사실 얼마 전 입었던 것을 다시 주워 입은 것이다. 계속 돌려 입는다. 옷 조합만 달리하면 사람들이 잘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름 학교에서 패셔니스타로 통한다.
“띵동”
친구들이 찾아왔다.
“경호야, 오늘 저녁 소개팅할까 하는데, 너 같이 할래? 잘되면 술도 한잔하고.”
“소개팅?”
“아.. 좋긴 한데, 무슨 과 애들인데?”
“경호야, 우리가 누구냐? 이번에 무용과 2학년 애들로 준비했다. 아무래도 네가 나가야 하지 않겠니? 우리 과가 좀.. 애들이... 공대라 알잖아? 그래도 너가 상태가 좀 괜찮지 않니? 너가 가서 분위기 좀 띄워줘라.”
“그런데, 결정적으로 내가 지금 돈이 하나도 없다. 이번 달 월세도 내야 하는데 지금 돈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어.”
“…”
“…”
다들 지방에서 올라와 자취하는 친구들이라 형편이 넉넉지 못한 관계로 선뜻 도와준다거나 나서서 해결책을 끌어주는 친구가 없었다. 그냥 순간 침묵뿐이다. 요즘 청년들의 삶이란 게 그렇다.
“경호야, 너 그거 있네. 그거”
한 친구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뭐?”
“너 손에 끼고 있는 그 커플링 중고나라에 팔면 되겠다.”
“야, 이걸 어떻게…”
“뭐 어때 이미 헤어진 애인이랑 한 건데, 지금은 필요 없잖아. 내 아이디로 중고나라에 올릴게. 그러면 너가 파는지도 모를 거야..”
“야, 그래도 어떻게…”
그렇다. 얼마 전까지 난 사랑을 했었다. 그것도 1학년 새내기랑 씨씨였다. 그녀는 군 제대 후 선후배 간담회에서 처음 만났다. 대학문화라는 게 그렇다. 왠지 선배는 좀 큰 어른 같고 듬직해 보인 다랄까? 사실 생각해보면 얼마 차이도 나지 않는데 대학교란 사회에서는 그런 느낌이 유달리 크다. 그날 우리는 뒤풀이 할 때 같은 테이블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대학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난 그녀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으며, 그녀는 날 큰 어른처럼 바라보았다. 왠지 우쭐해지는 기분도 들었고, 앞으로 내가 이아이를 지켜줘야겠다는 어설픈 뭐랄까… 취해서 그런지 여하튼 모든 걸 보호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그 후 과에서 공인된 커플이 되었으며, 하루의 모든 시간을 함께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 내 왼쪽 약지에 껴있는 반지가 그 결과로 생긴 커플링이다.
이런 걸 팔자고 하다니. 내 친구들이지만 정말 개념도 없고 사랑도 없고, 인생 그 자체가 코미디 같은 이들이다.
이 커플링을 받던 날이 기억난다.
그녀가 한 달간 편의점 알바를 마치고 내게 연락을 했다. 그리고 그간 받은 알바비로 커플링을 마련하였다며, 자랑스러워 하는 눈빛으로 나에게 하나를 건넸다. 생각보다 비싸 보이는 반지였다.
“이거 비싸 보이는데…”
“아니야, 오빠랑 꼭 같이 하고 싶었어. 그래서 좀 무리가 돼도 좋은 걸로 했지롱.”
알바하는것도 힘들었을 텐데, 난 그렇게 많이 신경을 써주지 못한 것 같은데.. 하는 죄책감도 조금 밀려왔다. 그 후로 나의 손가락엔 이 반지가 항상 껴있게 되었다. 그녀와 헤어진 후에도 난 습관적으로 이 반지를 항상 손에 끼고 있었다. 이런 사연이 있는 반지를 판다는건 말이 되지 않는다.
‘헤어졌지만 그래도 이 반지를 파는 건 그래도 아닌 건 아니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니 친구들이 조금은 경멸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월세는 어떻게 마련해야 하지? 부모님께 손 안 벌린다고 다짐했었는데, 연락해야 하나?”
어찌 보면 별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속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띵동”
알람 소리가 들렸다.
“경호야 경호야. 내가 중고나라에 올렸는데, 벌써 연락이 왔는데!”
예전 여친을 생각하며 잠시 추억에 젖여 있는 나를 현실로 댕기는 말이었다.
“벌써?”
“와.. 이거 인연인가 보다. 요기 앞에 지하철에서 직거래할 수 있냐고 연락 왔어. 그것도 지금 바로. 금액도 20만원 쿨거래 하자는데?”
20만원. 생각보다 큰 금액이었다.
“경호야 너 어떻게 할래? 거래할 거면 내가 지금 바로 답장 메시지 보낼게. 경호야 보낼까?”
“그래도 이 반지를 파는 건 정말 아니지 않니?”
나는 강한 거부감을 가진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
“…”
“…”
잠시 동안이지만 이 어두운 지하 단칸방에 침묵이 흘렀다. 각자 다른 이유를 가진 침묵이었겠지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잠시 후 한 친구가 입문을 열었다.
“뭐, 어때. 어차피 헤어졌는데. 너 상황도 힘들잖아. 예전 여친도 이해할걸?”
한 친구가 거침없이 말을 했다. 그러자 다른 친구도 침묵을 깨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 경호야. 그 반지는 너가 예전 여친과 사귈 때나 의미가 있는 거지 헤어진 다음에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그러니 지금 거래하자.”
“…”
잠시 말없이 생각의 시간을 가졌다. 그게 전 여친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거래 하자. 콜!”
거래를 결정하니 나의 머릿속 고민도 모두 없어지는 것 같았다. 마음이 맑아졌다.
난 그래도 예의를 지킨 것이다. 난 알고보면 착한 사람이며, 사랑에 대한 예의를 간직한 순정파인 것이다. 인간의 본능과 예의상에서의 갈등을 통해 전 여친에 대해 할 만큼 한 것이다.
난 이내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계단을 오르는 나의 발걸음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오늘따라 햇살도 유난히 아름답게 느껴졌다.
“경호야! 너 오늘 술 사라. 알았지?”
마치 나의 고민을 자신이 해결 해준것 마냥 으슥대는 친구의 모습도 귀엽게 느껴졌다.
우리는 함께 웃었다.
“하하하하하”
행복으로 가득하다. 웃음으로 가득하다.
이런게 인생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