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이후 가장 긴 여행을 다녀왔다. 지금 다니는 병원에서는 채취 후에 난소를 쉬게 하는 피임약을 제외하고 다른 약을 주지 않아서, 채취 후에는 다음 주기까지 꽤나 긴 휴가가 주어진다.그런 이유로 채취를 마친 다음 날, 우리는 예정보다 하루 일찍 짐을 쌌다. 즉흥적으로 하루를 머무르게 된 익산과 눈 오는 날도, 비 오는 날도, 맑은 날도 평화롭기만 했던 진도에서 우리는 일주일간 머물렀다.
배추밭이 어쩜 그렇게 예쁜지 바다는 또 얼마나 잔잔하고 평화로운지, 난생 처음 깨달았던 그곳에서 여행을 떠나기 직전까지 어떤 일상을 보냈는지 까맣게 잊은 채 게으르게 지냈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배가 고플 때 주섬주섬 움직여 제일 먼저 보이는 동네 식당으로 들어갔다. 오일장에서 파는 뻥튀기 한 봉지를 사며 깔깔거리고, 손주를 맞이한 할머니처럼 소박하지만 정이 넘쳐나는 백반 상차림에 조용히 감탄했다. 보이는 것마다 놀랍고, 마주치는 사람마다 친절했다. 다음 번에는 살러오라는 어느 어르신의 말에 잠깐이지만 진심으로 그럴까 싶어졌다.
너무나 사소한 것에도 감동하는 나와 남편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험관 시술을 중심으로 여행도, 일도, 때로는 나 자신도 미루며 살았나 보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핑계로 행복을 덮어두고 살았나 보다. 차수가 쌓일수록 커지는 경제적 부담 때문에 스스로를 위한 지출을 줄였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진행되는 과배 일정에 맞춰 중요한 약속을 취소해야 했다. 때로는 여행 중에도 병원을 찾아야 했다. 이렇게까지 희생했는데도 아이가 오지 않는다고 억울해했던 순간들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난임이어도 행복할 수 있다. 아니, 행복해야 한다. 아이가 있든 없든, 내 삶은 여전히 소중하고, 나 자신을 돌볼 가치가 있다. 난임이라는 이유로 삶을 멈추고 행복을 유예할 필요는 없다. 집중할 땐 집중하되, 시술 사이사이 주어진 시간을 충분히 즐겨야 한다. 아이가 오지 않는다고 내 삶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아이를 기다리는 시간도 결국 내 인생의 일부이며, 그 안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문득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지칠 때, 어떤 물음표를 떠올렸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나 자신을 잃어버린 걸까? 과거의 나는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여행을 계획하며 작은 기쁨들을 누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사라지고 '엄마가 되기 위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엄마가 되든 되지 않든, 나는 여전히 나로서 살아가야 한다. 시험관 시술 과정이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
우리는 때때로 난임이라는 현실 속에서 행복을 미룬다. 하지만 난임과 행복은 공존할 수 있다. 시술 과정이 힘들다고 해서 모든 기쁨을 내려놓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 시간을 나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시간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제는 다짐한다. 앞으로 나는 작은 행복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음식을 먹고, 좋아하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 시간을 보낼 것이다. 아이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내 삶은 그렇듯 풍요롭도록. 난임이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행복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만들어 가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