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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vid Jan 12. 2023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암에 걸리고 나서 현실로 마주하게 된 것이 바로 죽음이다. 그전까지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에게 적용되는 개념이었고, 죽음이란 내 머릿속에서 '타인의 죽음'으로 자동변환되었다. 거기에는 유전자 탓도 있었다. 먼 조상부터 주욱 내려온 유전자의 모든 속성이 장수에 세팅이 되어 있는지 나이 40이 다 되도록 내가 직접 목격한 죽음은 100세가 다되어 돌아가신 할머니의 죽음뿐이었다. 하지만 워낙 고령이셨기에 할머니의 영면은 가족들에게 비극이라기보다는 덤덤히 받아들여야 할 숙명과 같았다.


 전혀 예상치 못해 충격을 받은 죽음은 매형의 죽음이었다. 어느 날 걸려온 한 통의 전화. 그리고 울부짖는 누나의 목소리. 매형이 폐암 말기라는 것이었다. 암이라는 게 큰 병이지만 그 대상이 타인일 때 우리는 그것을 큰 병으로 인식하지는 않는다. 그때도 그랬다. 암이 치료가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모르는 거라 생각했다. 치료받으면 좋아질 수도 있으니까. 아무리 지독한 암이라도 생존율 0%인 암은 없으니까.


 하지만 매형은 날이 갈수록 야위어갔고, 병원에서는 너무 늦었다는 이유로 그 어떤 치료도 하지 않았다. 본인의 의사가 반영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해할 수 없었고 그렇게 시간만 흘렀다. 그리고 마지막이 될지 모르겠다는 누나의 전화에 황급히 병원에 가서 매형을 보았다. 매형은 살아있을 때 내게 더 너그럽지 못했음에 대해 사과했다. 그리고 헛것이 보이는지 벽에 있는 그림을 가리키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이 매형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일주일이 지난 후 매형은 세상을 떠났다.


 매형의 나이는 50 언저리였고, 조카는 중학생이었다. 남편을 잃고 아들과 함께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하는 누나의 마음을 나는 헤아릴 수가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누나가 느끼는 슬픔이 내가 살면서 느낀 평범한 슬픔보다는 한없이 깊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고, 냉정하고 차가운 나였지만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는 없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죽을 거라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21년 1월 비인두암 진단을 받게 되었고 이제는 죽음이라는 것이 삶의 연장선 상에 있음을, 그리고 그 선의 길이가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암 치료 성적은 좋았다. 운이 좋아 임상 실험에까지 참여하며 삶의 길이를 조금이라도 연장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무한한 줄 알았던 직선이 사실은 유한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그 선의 끝에 있는 죽음이라는 마침표가 늘 신경 쓰였다.


 암에 걸리고 시작한 글쓰기, 특히 소설에서 주제는 늘 죽음으로 수렴한다. 다른 얘기에서 시작해도 죽음을 언급할 수밖에 없고, 삶에 대해 깊이 파고들수록 죽음을 피해 갈 수가 없었다.


 나는 최악의 경우(암이 재발하지 않은 상태인 것과 무관하게) 내가 살 수 있는 기간은 3년이라고 자신을 속이는 경우가 많다. 불행이 어느 순간 닥쳐오든 남은 삶을 충만하게 살기 위해서다. 예전의 나는 내 몸과 마음의 안식을 우선순위에서 제일 뒤로 밀어놓고, 찬란하게 펼쳐질 성공과 내가 해야만 하는 의무에 자신을 갈아 넣었다. 직장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무리해 가며 일을 했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위해 술을 마셔댔다. 몸은 망가져갔고 정신은 피폐해졌지만 눈앞에 놓인 달콤한 사탕의 유혹에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나면 놓칠 수밖에 없는 행복을 늘 유예했다.


 건강한 삶으로 되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공포 속에서의 1년은 내 가치관을 확 바꿔버렸다. 다시는 예전과 같이 살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그래서 복직을 할 때 회사 일에 끌려다니지 않을 거라고 자신만만해했다. 하지만 인간은 관성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고, 아주 짧은 순간의 방심은 혹독한 시련을 통해 정립한 삶의 철학을 무너뜨려버렸다. 나도 모르게 일에 열중하고 있었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건강을 망치고 있었다.


 죽기 전에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 것인지, 어떻게 죽을 것인지 이런저런 상상을 해본다. 가장 겁이 나는 것은 질병으로 인해 고통받으며 극심한 고통 속에 죽어가는 것. 그러다 보니 호스피스, 안락사와 같은 죽음 관련 제도에 많은 관심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당장 죽을 것 같다는 의미가 아니다. 언젠간 닥칠 일이니 미리미리 준비하고 사회가 이런 주제에 대해 열린 토론을 하며 성숙한 제도를 만들어가야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삶을 마무리해야 할 때 존엄하게 죽을 수 있지 않겠는가?


 주제는 거창했으나 역시 결론을 맺는 것은 어렵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그러니 인간다운 삶과 죽음을 준비하고 사회적으로 정착되도록 노력해야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봐야겠다. 그리고 다른 사람, 회사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오감의 민감도를 최대한 높여 소소한 행복에 즐거울 하루를 보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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