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삐약이 Oct 04. 2024

10. 멀리 돌아오긴 했지만

시각장애인과 안마

고등학생 시절 나는 안마를 의무적으로 배워야 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나 때는 안마가 의무 교육이었고 필수였다. 그래서 고1 때부터 안마를 배우기 시작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안마를 배운다는 게 감사한 일이었지만, 그 때의 나는 그것이 감사한 일인지도 모른 채 안마를 하며 늘 '나는 안마사는 안 될 거야' 하고 되뇌이곤 했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안마를 하고 있으니 역시 세상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맞는 것 같다.

여하튼 안마를 하면서도 늘 입버릇처럼 "전 안마는 안 할 거예요"라고 하며 안마에 대한 흥미를 갖지 못했다. 그에 비해 우리반 남자애는 나와 다른 생각을 했는데, 안마를 열심히 해서 대학을 가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반에서는 안마 시간이 되면 나는 주로 안마를 하긴 해도 많이 하지는 않고 책을 보거나 하며 딴 짓을 했지만 그 친구는 안마 시간만 되면 눈을 빛내며 안마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때는 오직 내 기준으로 생각을 하는 아이였던 나는 내가 하는 게 옳다고 여기고 안마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고, 내가 커서도 안마 이외의 다른 직업을 가질 거라 여겼다.

그렇지만 그건 너무나 어리숙한 생각이었음을 지금은 안다. 왜냐하면 사람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안마를 하지 않겠다고 했던 내가 지금은 경로당을 다니며 안마를 하고 있다.

내 목표를 위해 굽이굽이 돌았지만, 다시 돌아온 길은 안마였고 그 일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사실 내가 안마를 하기 꺼려 했던 이유는 우리집에서 안마를 반대하는 게 크기도 했는데 지금 와 생각하면 그것 역시 신중한 판단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당시 상황을 보면 안마는 시술소에서 많이 했고, 경로당 파견 안마나 헬스키퍼가 많이 없을 때였다. 내가 졸업을 하고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헬스키퍼와 경로당 파견 안마가 나타났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까지 안마는 오직 시술소에서만 이루어졌다. 그렇다보니 밤에 일하고 낮에 자는 생활을 해야 했고, 무엇보다 시술소에서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난다는 말에 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하시기도 해서 안마는 생각도 안 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은 변화가 있음을 이제는 알 수 있다. 시술소에서만 했던 안마를 이제는 안마원이나 헬스키퍼, 경로당 파견 안마 등 다양한 곳에서 할 수 있게 됐고, 무엇보다 안마사라는 직업에 대한 부정적인 면도 많이 사라졌다. 그리고 안마를 배운다 해서 큰 일이 나는 것도 아님을 이제는 깨닫게 됐다.

그렇기에 나는 내 주변 시각장애인이 안마를 한다 해도 말릴 생각은 없다. 오히려 해보고 안 되면 다른 일로 가라고 하겠지만, 처음부터 거절하진 않을 것 같다.

세상 일은 뜻대로 될 듯하면서 안 되는 것들이 많다. 나 역시 성우를 꿈 꿨지만 할 수 없었듯, 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할 수 는 일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자 일상이다.

그러니까 모든 것에 도전 해보고 그 일을 해보면서 자신의 달란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많이 느끼는 요즘이다.

작가의 이전글 9. 도움을 받을 때 언제나 감사함을 잊지 말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