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 쓸데없는 집착

by 아직인생초보

그다지 정리에 소질이 없기도 하다. 그래서 그냥 둔 것도 있다. 쳐다보기 싫어서 귀찮아서 그냥 둔 것이 맞다. 그릇들을 버리면 그 시절의 나도 버리는 것 같다는 고리타분한 생각을 거두고 그릇을 버렸다. 싱크대 상부장 가장 큰 공간은 쓸모없는 그릇으로 가득 차 있었다. 쓸모가 없다는 것은 더 이상 내 손이 가지 않는 그릇, 아무것도 없던 시절 그저 몇 개 챙겨 와서 살림을 시작했던 그릇, 그 보다 더 오래전 시어머니가 쥐고는 놓지 않았던 그릇들을 말한다.


나는 왜 늘 과거를 들춰내는 것이 싫은지 모르겠다. 언제나 지금이 가장 괜찮은 순간이다. 20대도 30대도 열심히 살았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릇들을 꺼내 쓰지 않은 것은 과거가 묻어나서 그랬다고 핑계를 대도 될 만큼 내 기억들이 묻어있다. 그래서 상부장에 가둬놓고 쳐다보지도 않았는지 모른다.


갇혀 있던 기억들을 하나씩 꺼냈다. 이건 언제 쓰던 그릇, 또 이건 언제 산 그릇, 옆에서 첫째가 와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그릇이네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래도 버렸다. 아이스크림을 먹었을 때의 기억만 남으면 되니까 굳이 그 시절을 곱씹으면서 우린 행복했지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지금 행복하기 때문이다.


한가득 상부장의 그릇을 빼내고, 그나마 나에게 죄를 덜 지은 기억들만 남겨둔다. 그릇들은 나에게 죄를 지은 것이 맞다. 열심히 살려고 그렇게 바둥거려도 해결되지 않았던 그때의 기억들은 내 마음속에서 유죄가 분명하다. 그릇들의 탓은 아니지만 나 자신의 죄책감을 덮어씌우기에 딱이다. 왜냐하면 재활용 분리수거장에 버리면서 아쉬움도 있지만 후련함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새로 그릇을 산 것도 아니다. 더 이상 무엇인가를 쌓아두고 싶지 않다. 그저 딱 이만큼만 잘 쓰다가 버려야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서 다시 사야지 싶다. 추억이라는 것은 쌓아놓기만 하다 보면 가끔 금이 간다. 그것을 모르고 계속 쌓다 보면 결국 부서지고 무너진다. 너무 깊게 쌓지 말자. 너무 높게도 쌓지 말자.

keyword
작가의 이전글너는 참 잘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