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만 자면 우리의 여행도 끝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헛헛했다. 공항으로 이동할 시간을 생각하면 내일은 점심을 먹고 곧장 떠나야 한다.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여행 동안 걷고, 보고, 느끼며 마음껏 행복했지만 마지막은 언제나 아쉬움을 남기기 마련이다.
그럴 때 단순한 나를 달래 주는 건 역시 맛있는 음식이다. 그래서 마지막 날 저녁은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보내기로 했다.
동생이 미리 예약해 둔 La Cabaña Argentina(라 카바냐 아르헨티나)
현지인들에게도 유명한 곳이지만 한국 유튜브 채널에서 소개된 뒤로 한국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식당이 되었다고 한다. 은은한 조명과 고급스러운 실내 분위기, 단정하게 정돈된 테이블이 음식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주었다.
스테이크가 유명하다길래 소고기와 돼지고기 요리, 그리고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문어 요리도 주문했다. 음식에 어울릴 만한 와인도 추천받아 한 잔씩 맛보기로 했다.
요리는 작은 화로 위에 올려져 나와 먹는 동안 따뜻함이 유지됐다. 음식은 기대만큼 맛있었고 우리의 입맛에도 잘 맞았다.
직원들 또한 모두 친절하고 유쾌했다. 비용을 지불하고 받는 음식과 서비스였지만 그 이상의 환대와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마음이 한결 따뜻해졌다.
그렇게 몸과 마음의 허기를 채우며 우리는 여행의 순간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서로의 감회를 오래 나누며 이 밤이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도 감사했다.
이제 잠시 멈춰 두었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숙소로 돌아와 빠진 것이 없는지 꼼꼼히 확인하며 짐을 싸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조금 일찍 일어나 마드리드에서의 마지막 산책을 나섰다. 오늘의 산책 장소는 레티로 공원. 숙소에서 걸어서 30분 정도 거리다. 오늘이 지나면 언제 다시 이 길을 걸을 수 있을지 알 수 없겠구나 생각하니 거리의 풍경 하나하나가 더욱 아름답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눈에 담으며 걷다 보니 어제 들렀던 프라도 미술관이 보였다. 미술관을 지나 조금 더 걸으니 공원의 큰 문이 나타났고, 안으로 들어가자 잘 정돈된 나무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동네의 작은 공원을 떠올렸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꽤 컸다. 안쪽에는 넓은 호수도 있었다.
호수 근처에서는 거리 음악가가 연주를 하고 있었다. 바이올린 소리가 상쾌한 아침 공기 사이로 천천히 번졌다.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음악을 들었다. 눈부신 아침 햇살과 청명한 하늘, 아름다운 호수의 풍경에 낭만적인 음악까지 더해져 완벽한 아침 산책이 되었다.
헤어지고 싶지 않은 풍경이었지만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숙소로 향했다. 가는 길에 우연히 들른 커피숍. 맛도, 사이즈도 모두 취향 저격이었다. 커피를 테이크아웃하면 항상 남기는 편인데 우리나라 카페도 이렇게 작은 사이즈로 팔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박 3일 동안 머물렀던 호스텔 마르라스카(Marlasca)는 깔끔하고 안락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름 정이 들었던 미로 같은 복도와 나선형 계단, 네 명이면 꽉 차는 작은 엘리베이터와 작별하고 마드리드에서 새로 산 은색 캐리어와 함께 거리로 나왔다.
공항으로 이동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솔 광장과 곰 동상을 한 번 더 둘러본 뒤 점심을 먹기로 했다.
매운 홍합탕으로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Bar El Rocio(바 엘 로시오).
맛있다는 소문이 자자해서 꼭 방문해 보기로 마음먹었던 곳이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식당은 아직 문을 열기 전이었다. 사장님이 오픈 준비를 하고 계셨다. 너무 대놓고 앞에서 기다리면 부담스러우실까 봐 골목 한켠에 숨어 있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들어갔다. 우리가 첫 손님이었다.
홍합탕과 오징어튀김, 감바스를 주문했는데, 산처럼 쌓인 홍합 양에 우선 만족했고 맛을 본 뒤에는 두 배로 만족했다.
매콤하면서도 자극적이지 않은 맛이 우리의 식욕을 끌어올렸고 순식간에 접시를 비운 뒤 추가 주문까지 했다. 한 접시 더 주문하려다가 참았을 정도로 맛있었다. 배를 채우고 나서야 정신없이 홍합 껍데기로 국물을 떠먹고 빵까지 찍어 먹으며 손가락을 쪽쪽 빨던 우리의 모습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래도 마지막 식사로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근처 까르푸에 들러 착즙 오렌지주스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고 공항으로 향했다.(생 오렌지가 기계에서 바로 착즙 되어 나오면 옆에 진열된 공병에 받으면 된다. 신선하고 맛있고 저렴하니 꼭 먹어보라고 여러 곳에서 추천받았다.)
택시 앞 좌석에 앉은 동생은 기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뒷좌석에 앉은 나와 눈이 마주친 기사님은 빙그레 웃어 보이셨다. 음악 소리를 낮추고 편안하게 갈 수 있도록 운전하시는 모습에서 작은 배려가 느껴졌다. 덕분에 우리에게 스페인은 헤어지는 날까지도 따뜻하고 좋은 인상으로 남았다.
이륙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면세점을 둘러보며 가족과 지인들에게 줄 선물을 사기로 했다. 인천공항처럼 클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작았고 상품도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격이 비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드리드 시내에서 미리 살걸 그랬다.
뚜론과 초콜릿, 화장품 등을 몇 개 고른 뒤 탑승 게이트 앞에 앉았다. 대부분의 승객들도 우리처럼 스페인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가족들이나 연인들이었다. 그들 역시 저마다의 소중한 기억을 품고 있겠지.
한국에 돌아가면 추석 연휴도 거의 끝나 있을 것이다. 시차와 일상에 다시 적응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를 가득 채워 준 스페인에서의 경험과 감각들이 앞으로의 날들을 더 성실하게 살아가게 할 힘이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여행 끝의 아쉬움은 어느새 우리가 함께한 시간만큼의 충만함으로 천천히 채워진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한동안 이 여행을 자주 떠올리게 되겠지.
이제 정말 떠날 시간이다.
동그란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에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안녕, 마드리드.
안녕, 스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