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라면
배고픈 아이에게 라면 하나를 끓여 준다. 딸아이가 좋아하는 라면. 아빠가 끓여준 라면은 엄마가 끓여준 것보다 맛있다고 말하는 아이. 왠지 아내한테 이긴 것 같은 기분에 작은 미소가 난다. 경쟁 상대는 아니지만.
라면을 집중해서 먹고 있는 아이. 면이 기니 면을 앞니로 끊어가며 먹는 모습이 다람쥐가 도토리를 먹듯 귀엽다. 확실히 귀엽다. 내 딸이라 그런지.
“아빠가 끓여준 라면은 정말 맛있어.” 그러게, 내가 끓여준 라면은 왜 맛있지?
생각해 보면 이유는 간단하다. 많이 끓여 먹었다. 딸아이보다 더 어릴 때부터 끓여 먹었다. 내 아이에게는 가스레인지를 못 쓰게 하지만 그 시절에는 해야 했다. 부모님이 고향을 떠나 도시 이주민으로 살기로 결심하셨을 때, 마흔이 넘은 내가 기억하는 게 하나 있다. 트럭을 타고 동생과 엄마랑 같이 온 인천에 대한 기억.
이 기억이 좋았는지 나빴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기억이 난다. 트럭을 타고 밤을 지나 도착한 인천의 한 허름한 집. 부모님은 하루하루 살기 위해 일했다. 그렇다고 경제 사정이 좋았던 건 아니었다. 먼 타향에 와 산다는 것은 고향에서도 타향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했단 증거이니까.
그때는 부와 가난이라는 개념을 몰랐다. 그곳의 친구들과 동네에서 놀았다. 특히 근처 벽돌 공장에 산처럼 쌓여 있던 모래산에서 아이들과 뛰어놀곤 했다. 그 모래성의 맨 꼭대기를 올라가기 위해 작은 팔다리를 이용해 기어 올라간 정상. 정상에 오르는 기분은 좋았고, 공장들 사이로 천천히 내려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것은 세상의 왕이 된 것 같았다. 내가 아는 곳 중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나.
지금 생각해 보면 부모님에게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이 노을을 보기 위해 집에 없는 아이와 아이가 보이지 않아 불안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크게 부르는 소리.
점점 부모님의 퇴근 시간은 늦어지셨다. 그래서 사주신 라면 한 박스. 그 라면 한 박스는 부모님에게는 미안함과 절박함이었다. 그런데 그 라면 한 박스는 나에게는 행복감이었다. 도시 빈민 아이에게 이보다 좋은 간식이자 식사가 아닐 수 없었다.
친구들과 놀다 군것질을 하고 싶으면 생라면에 수프를 뿌려 먹는 게 너무 좋았다. 가끔은 지금도 먹는다. 참 신기하게 우리 딸아이도 좋아한다. 냉장고에는 과일, 주방에는 과자가 있는데 말이다. 35년 전 라면 한 박스가 딸아이에게도 간식이 되어주고 있는 것 같다. 시간과 공간만 다른 채.
식사였던 라면. 부모님이 안 오시면 동생과 같이 끓여 먹었다. 냉장고에 있던 신김치를 꺼내 요리사 마냥 칼로 잘라 라면에 넣어 먹었다.
내 라면 맛의 비결은 35년 이상의 꾸준함이다. 그리고 이 전통이 오래가길 빈다. 언제나 “배고파, 아빠!” 하면 끓여줄 수 있는 아빠가 되고 싶다. 그게 아빠의 라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