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떠나는 것이다.
자기에게 가장 익숙한 공간을 떠나고,
자기에게 가장 편안한 사람들을 떠나고,
자기 몸이 기억하는 습관을 떠나고,
가끔은 세상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자기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언어를 떠난다.
그 떠남이 아쉬움일 때도 있고,
홀가분함일 때도 있다.
'떠나다'라는 의미의 영어 동사 leave는
'남기다'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구어체 러시아어에서 같은 의미의 동사 кидать[kidat'], бросать[brosat']는
'던지다', '버리다'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으며,
같은 의미의 폴란드어 동사 opuszczać에서 접두사를 뺀 puszczać는
'놓다'라는 의미이다.
손에 쥔 걸
혹은
마음에 담은 걸
혹은
발목을 옭아매고 있는 걸
그대로 남기고, 놓고, 버리고, 던질 수 있는 사람만이
떠날 수도 있다.
가진 게 없어야 떠날 수 있다.
그래서 비교적 쉽게 떠날 수 있는
자유가
대체로 좋지만,
아주 가끔씩은
떠날 수 없는 그 이유가 부럽기도 하다.
가진 게 많아서
남길 게 많은 사람,
너무 소중해서
절대 버릴 수 없는 걸 가진 사람은
떠나기도 어렵다.
하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남기고 갈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떠나지 못한다는 걸 알지 못한다.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여행이 그냥 떠나기만 하는, 멀어지기만 하는 건 아니다.
또 어딘가에 도달하고, 어딘가로 가까와지는 것이기도 하다.
여행지에 도달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여행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말은 짧아지는 대신
생각이 길어지면서
익숙한 낡은 공간에서
익숙치 않은 새로운 공간을 향하다가
이제 새로운 공간에 다 왔다고 생각한 순간
결국은 나자신 안에 깊이 머물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지금 가장 그리워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내가 지금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전에 원했던 그것이 얼마나 의미없는 것이었는지,
내 이름 앞에 놓여 있던 수많은 명사들과 형용사들을 제외하고 남은 나는 어떤 모습인지,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기타등등 기타등등
나에 관한 생각들이 많아진다.
익숙한 것들로부터 벗어나려,
몸에 익은 것들로부터 멀어지려 떠난 여행에서도
아니
어쩌면 그런 여행일수록
어김없이
결국
가장 익숙한,
가장 가까운,
하지만 그래서 더 잘 모르는,
그걸 잘 모른다는 것 자체를 잘 모르는
나 자신을 맞딱드리게 된다.
떠나지만 결국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여행에 관한 글을 쓰고, 읽는 것 또한
다른 의미에서
떠나지만 결국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머리는 떠나지만, 몸은 남아있는 거니까.
몇년 전 한 친구가
자기 같은 여행 초보를 위해서 blog 같은 걸 한번 해달라고,
아주 아주 기초적인 정보를 담아서 써달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허공에 대고,
혹은 낯선 사람들의 귀에 대고 중얼거리는 게
뭔가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몇년동안 그냥 생각만 하다가 몇 주전 blog를 시작했다.
blog보다는 brunch가 낫지 않겠냐는
지인의 제안에
5개 정도 포스팅을 올리다 이제 brunch로 갈아탔다.
어쩜 여기엔
다른 여행 blog나 여행 brunch에서 만나게 되는
실용적인 정보가 담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맛집 정보나 쇼핑 정보 그런 거 아마 거의 없을거다.
쇼핑도 별로 안 좋아하는 내가
여행 가서 갑자기 그런 걸 즐겨 하는 것도 이상하고,
그런 걸 잘 모르면서 아는 척 얘기하는 건 사실 더 이상하다.
또한
어차피 맛난 것과 아닌 것을 구별 잘 못하는
열등한 미각을 소유한 데다가,
그 때문에 변명처럼 떠오르는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개성이 각각 다른 아이들을 성적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일등부터 백만등까지 줄세워놓는 것만큼이나,
아름다움이라는 매우 주관적 가치에 국가와 지역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 그것도 매년 새로운 등수를 매기는 미인대회만큼이나,
매우 상대적이고 주관적일 수 있는 맛이라는 가치에 우열을 매기고 줄을 세우는 것이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현대 도시인의 헛된 유희인 듯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좀 더 오래 있었던,
좀 더 잘 아는 도시에 대해서는
좀 긴 호흡으로,
많은 포스팅에 거쳐 많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대체로 언어를 어느 정도 구사하는 지역을 여행하기 때문에,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언어를 공부하러 갔다가
여행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리고 따라서 대체로 길게 체류하는 편이기 때문에,
아마 보통의 단기 여행자들은 잘 모를 수도 있는,
현지인들에게 들은 이야기도 좀 하게 될 것이다.
찰나적인 아름다움을 담은 사진이나 동영상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 찰나적 아름다움을 지탱하고 있는
좀 더 진득한 것들,
좀 더 깊은 곳에 있는 것들,
보는데 좀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들,
아는데 좀 더 노력이 필요한 것들,
역사, 전설, 전통, 언어, 문화,
어떤 도시나 나라에서 반복적으로 감지되는 특징 같은 것에 대한
주관적인 인상을 얘기할거다.
그리고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친구들에게
미처 다 보여주지 못한 사진과 동영상,
미처 다 말하지 못했던 생각을
아마 여기서 풀어 놓게 될 것 같다.
떠나지만 떠나지 못하는 나 자신과
내가 소리치고 있는 허공 어딘가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미지의 독자들을 위해서.